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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향교 대성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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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유 제8호(71. 12. 2) 전라북도 남원시 향교동 512
이곳 대성전은 공자를 모신 사당이다. 조선왕조는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아 나라에서 각 지방에 향교라는 학교를 세우고 그 안에 대성전을 두어 유학을 장려하였다. 남원향교는 조선 태종 때 성안 서쪽 골짜기에 처음 세웠다가 얼마 후 요천 건너편으로 옮겼는데, 요천이 범람할 때마다 학생들이 통학하기 어려워 세종 25년(1443)에 지금의 자리로 다시 이사했다고 전한다. 그후 정유재란 때 향교 건물이 모두 불타버렸으나, 선조 32년(1599)에 지방의 유지 유인옥(柳仁沃)이 대성전을 다시 지었다. 대성전 안에는 공자를 중심으로 여러 성현과 유학자를 모셨으며, 매년 봄가을을 맞아 이곳에서 <석전대제>라는 큰 제사를 지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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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두산 마애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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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유형문화재 제199호(2003.5.16지정) 남원시 수지면 고평리 산102-4번지
이 마애불은 저부조의 선각에 가까운 조각기법과 장대한 신체표현, 수인 형태,비만한 듯한 얼굴에 꽉 다문 입 등의 얼굴표정은 여원치 마애불상 등 남원 지역마애불과 친연성을 보여주며 제작연대는 고려시대 전반∼중반 경으로 추정된다. 당시 이 지역의 마애불의 한 형식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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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사 7층석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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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유 제11호(71. 12. 2) 전라북도 남원시 주천면 용담리 292
이 석탑은 고려시대에 세운 것으로 현재 꼭대기 부분이 없어진 상태이다. 낮은 받침부는 하나의 돌로 만들었으나, 1층 몸체는 네 개의 판돌을 짜 맞추어 구성하였다. 2층부터는 몸체를 각기 하나의 돌로 만들었지만 5층만은 예외로 두 개의 돌을 놓아 몸체를 이루었다. 층마다 지붕 윗면은 경사가 완만하고 귀퉁이 밑은 거의 수평이다. 2층부터 몸체의 너비와 높이가 급격히 줄어드는데, 지붕은 너비가 좁은데 반해 높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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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관왕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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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유 제22호(73. 6. 23) 왕정동 51
이곳은 중국 삼국시대 영웅 관운장을 모신사당이다. 조선 선조32년(1599)에 남원부동문 밖에다 처음 세웠던 것을 숙종때 성안으로 옮겨다가 영조때 지금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우리 나라에서는 임진왜란때 지원군으로 온 명나라 군대의 영향을 받아 관운장을 숭배하기 시작했다. 당시 명군이 왜군을 맞아 힘든 전투를 하고 있는데, 하늘에서 관운장이 신비로운 군대를 이끌고 나타나 싸움에 승리하도록 도왔다는 것이다. 이관왕묘에는 흙으로 빚은 관운장 형상을 안치하여 봄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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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복사 철불좌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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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유 제23호(73. 6. 23) 전라북도 남원시 왕정동 283
이 철불은 고려시대에 만든 것으로 높이 103cm, 무릎폭 80cm, 어깨폭 50cm이다. 촘촘한 고수머리에 얼굴 윤곽은 사각에 가까우며, 눈은 작고 양 귀는 길게 쳐졌다. 옷깃이 왼쪽 어깨에서 수직으로 내려와 젖가슴 부위에서 여미어져 가슴이 넓게 드러나 있다. 네모난 얼굴로 온화함은 덜하지만, 어깨선이 부드럽고 가슴은 듬직하다. 책상다리를 한 하체를 두텁게 표현하여 안정된 모습을 이루며, 옷주름은 사실적이어서 입체감을 더해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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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복사 동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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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유 제24호(73. 6. 23) 전라북도 남원시 왕정동 283
이 종은 조선 인조 13년(1635)에 만든 것으로 높이 99cm, 둘레가 177cm이다. 종 어깨의 둘레를 따라가며 네 방향에 유곽이라고 부르는 큼직한 사각형을 하나씩 새겼다. 네 개의 유곽 테두리에 덩굴문양을 두르고 그 안에 꽃무늬를 세 개씩 3열로 배열하였다. 유곽들 사이에는 보살상을 조각하였으며, 그 아래에는 갖가지 글을 새겼다. 종 밑자락은 높이 6cm 가량의 덩굴문양을 둘러 장식하였다. 종 어깨 위 가장자리에는 작은 꽃잎무늬 장식을 줄지어 세웠는데, 이것은 고려시대 종에서 나타나는 양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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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원사 동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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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유 제25호(73. 6. 23) 전라북도 남원시 도통동 392
대웅전 안에 있는 이 종은 조선시대 말기에 만든 것이다. 종의 몸통 위 아래에 수평을 이루는 네 개의 띠를 둘러 다섯 칸으로 나누었다. 그중 맨 위칸에는 열 한 개의 작은 원을 나열하고 원 안에 범(梵)자를 1자씩 넣었다. 둘째 칸은 둘레를 따라가며 네 방향에 유곽이라고 부르는 큼직한 사각형을 하나씩 두었다. 네 개의 유곽 테두리에 덩굴문양을 두르고, 그 안에 꽃무늬를 세 개씩 3열로 배열하였다. 유곽들 사이에는 보살상을 조각하였으며, 그 아래에 갖가지 글을 새겼다. 종을 제작한 기법은 서툴지만 무늬가 다채롭고 독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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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당리 석불입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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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유 제44호(74. 9. 24) 전라북도 남원시 주생면 지당리 65
이 불상은 고려시대 말기에 만든 것으로, 서있는 부처의 모습과 그몸둘레에 서린빛을 묘사한 광배를 하나의 돌에 조각하였다. 불상의 발과 받침부가 땅 밑에 묻혀 있어 전체 높이는 4m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광배에는 연꽃무늬를 새겼는데 간략하게 표현하여 고려초기 불상에서 보이는 섬세함을 잃고 있다. 양어깨에 걸친 옷자락은 곡선으로 흘러내려 옷깃이 뚜렷한 U자를 이룬다. 불상의 체구가 거대하고 조각기법도 대담하고 거침이 없어 웅장한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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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사 극락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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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유 제45호(74. 9. 27)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 50
이 건물은 극락세계를 주관하는 아미타불을 모신 법당이다. 원래의 건물은 정유재란(1597) 때 불타버려 숙종(1674~1719) 때 다시 지었다. 그러나 고종 때 함양출신 양재묵(楊載默)과 산청출신 민동혁(閔東赫)이 절터를 가로채고자 건물을 불태워 버렸다. 후에 승려들이 힘을 모아 지금의 건물로 복구하였다. 건물 정면에는 정(井)자무늬 문살로 짠 문짝과 빗살무늬 문살로 짠 문짝을 번갈아 달아 다채로움을 더하였다. 둥근 기둥은 위아래 굵기의 변화가 없고, 천장은 바둑판 모양으로 짜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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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경암 석불좌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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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유 제46호(74. 9. 27) 전라북도 남원시 신촌동 124-1
이 불상은 고려시대에 만든 것으로 부처의 몸 둘레에 서린 빛을 묘사한 광배(光背) 부분이 매우 크고 정교하다. 광배 안쪽에는 연꽃무늬를 새기고 바깥쪽은 불꽃무늬로 둘렀다. 앉아 있는 부처의 높이는 117cm로 머리 윤곽이 뚜렷하나 얼굴 모습은 원만하다. 왼쪽 어깨에만 걸친 옷자락은 반듯하게 내려오다가 복부에서 급한 곡선을 그려 오른쪽 무릎에 이른다. 불상이 심하게 닳았지만 화려하고 세밀한 조각의 흔적이 남아 있어 뛰어난 작품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광배 위쪽 중앙과 좌우에는 작은불상을 하나씩 조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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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사 위토개량성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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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유 제88호(79. 12. 27)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 50
이 문서는 조선후기에 작성한 토지대장으로 실상사가 소유했던 일부 토지에 관해 기록한 서류이다. 문서에는 실상사와 소속 암자에 딸린 논과 밭의 소재지, 명칭, 위치, 형태, 등급, 지형, 경작자, 조세 등을 적어 놓았다. 앞뒤 표지를 합해 모두 열 아홉 장으로, 이 문서는 실상사의 옛 모습과 토지재산 규모를 짐작케 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 위토개량성책을 통해 조선후기의 토지대장 양식, 측량법, 조세제도를 살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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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리 석조여래입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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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유 제47호(74. 9. 27) 전라북도 남원시 주생면 낙동리 15-1
이 불상은 고려초기에 만든 것으로 무릎아래가 땅에 묻혀 있었다. 근래에 받침부가 노출됨으로써 불쌍으로서의 완전한 모습을 갖추었다. 전체 높이는 240cm이며, 부처의 몸 둘레에 서린 빛을 묘사한 광배에는 화려한 꽃과 불꽃 무늬를 조각하였다. 얼굴은 심하에 헐어 불분명한 모습이지만 전체적으로 둥글고 원만한 형태를 보여준다. 머리윤곽은 뚜렷하지 않고 볼은 두툼하여 온유한 느낌을 준다. 옷자락을 걸친 양어깨도 우아한 곡선을 이루어 부드러움을 더해 준다. 이 석불은 구조나 제작 기법에 있어 만복사지 석불과 비슷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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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잡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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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유 제107호(84. 9. 20) 전라북도 남원시 주천면 은송리 204
이 문서는 조선 선조 때 장군 조경남이 1582년부터 1638년까지 57년간의 국내 중요사실을 일기식으로 기록한 것이다. 임진왜란(1592)과 정유재란(1597)에 대해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보다 폭넓게 다루고 있으며, 이괄의 난, 정묘·병자호란 등 중요 사건과 풍속, 민간 생활 등을 상세하게 적어 놓아 귀중한 역사적 자료로 평가된다. 여덟권에 달하는 많은분량읨 문서로 문체 또한 수려하고 간결하다. 조정에서 선조수정실록을 엮을 때 이난중잡록을 빌려다가 베끼어 그 사본을 규장각에 보관하였고, 원본은 조경남의 후손이 오늘날까지 보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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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국사 대웅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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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유 제114호(85. 8. 16) 전라북도 남원시 산곡동 419
이 건물은 교룡산성 안에 자리한 선국사의 중심 법당으로 통일신라 신문왕 5년(685) 처음 지었다고 한다. 현재의 건물은 조선 순조 3년(1803)에 다시 지은 것이다. 받침부는 비교적 낮고, 위아래 굵기의 변화가 없는 반듯한 기둥을 썼다. 정면의 처마 밑 벽체에 다채로운 그림을 그려 넣어 화려함을 느끼게 한다. 대웅전 안에는 지방민속자료 제 5호로 지정된 큰 북과 조선시대에 사용했던 승병대장의 인장(印章)이 있어, 이곳이 임진왜란때 승병의 주둔지였음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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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원사 약사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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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유 제119호(86. 9. 8) 전라북도 남원시 도통동 395
이 건물은 중생의 고뇌를 구제하는 약사불을 모신 법당으로, 정유재란 때 불탄 것을 영조 30년(1754)에 다시 지었다. 선원사는 통일신라 헌강왕 원년(875)에 도선스님이 처음 세웠다. 사람들은 이 절이 남원의 번영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믿어 각별히 보호하고 후원해 왔다. 정유재란으로 절이 불타고 철제불상만 남게 되자, 절을 복구하면서 그 불상을 이곳 약사전에 모셨다. 받침부는 자연석을 낮게 쌓고 그 위에 돌판을 얹었으며, 기둥은 중간 부위를 볼록하게 부풀려 놓았다. 지붕과 처마의 앞면은 비교적 수평선을 이루어 소박한 멋을 풍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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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전리 석불입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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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유 제120호(86. 9. 8) 전라북도 남원시 송동면 세전리 산17
이 돌 조각은 고려 초기에 만든 것으로 부처 아닌 다른 인물을 묘사하였는데, 얼굴부위가 심하게 헐어 정확한 정체를 알 수 없다. 온 몸에 옷을 걸치고 양손을 맞은 편 소매 속에 집어넣어 팔장을 끼고 있는 모습으로 보아 얼핏 달마스님인 듯 하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먼 옛날 이곳에 절이 있었다 하나, 절은 없어진지 오래이다. 석상의 전체 높이는 2.7m이고 몸통 넓이는 1.75m, 앞 뒤 두께가 50cm이다. 작품을 다듬은 선이 원만하며 전체적으로 모습이 소박하여 아늑한 느낌을 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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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립리 석불입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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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유 제128호(87. 4. 28) 전라북도 남원시 이백면 과립리 520-1
이 불상은 통일신라 말기에 만든 것으로 보이며, 높이는 머리 부분이 1m, 몸체 부분이 3.5m로 거대한 조각품이다. 조선 정종(1398~1400) 때 이곳에 절을 지었는나, 임진왜란(1592)때 불타 없어지고 불상도 깨어져 머리와 받침만 남았다. 근래에 주변에서 두 조각으로 갈라진 불상의 몸체를 찾아 받침 위에 다시 세웠다. 불상의 머리 윤곽은 매우 뚜렷하고 얼굴형은 거의 직사각형이다. 눈은 지긋이 감았으며 귀는 턱까지 내려와 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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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상사 동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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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유 제137호(92. 6. 20)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 50
이 종은 조선 숙종 20년(1694)에 만든 것으로 전체 높이 123cm, 넓이는 83cm이다. 종 머리에는 용뉴라는 용모양의 고리가 있고, 그 옆에는 한국 종의 전통 요소인 용통이란 굵은 관을 달았다. 종 어깨의 둘레를 따라가며 네 방향에 유곽이라 부르는 큼직한 사각형을 하나씩 새겼다. 네 개의 유곽마다 그 안에 꽃무늬를 세 개씩 3열로 배열하였으며, 유곽들 사이에 보살상을 조각하였다. 용뉴와 용통의 장식이 간소하며 종의 밑자락에도 무늬를 새기지 않았다. 몸통에 새긴 딱딱한 선녀상을 볼 때, 조선후기 종의 장식기법이 형식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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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동향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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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유 제146호(94. 8. 10) 전라북도 남원시 주천면 호경리 81-4
향약은 마을 사람들의 상부상조와 미풍양속을 권장하기 위해 만든 마을자치규약으로, 이곳 원동의 향약은 조선 선조 5년(1572)에 마련되어 오늘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원동향약은 남원향약의 모태가 되었다. 원동향약과 관련한 이 책자들은 원동향약의 내용과 그것을 모범적으로 지켜 표창을 받은 사례 등을 기록한 것들이다. 그 중에는 인조 16년(1638)에 작성한 향약록과 숙종·영조·정조 때 만든 표창록 등 모두 20여권이 들어 있다. 종이는 한지로 창호지가 많고 크기는 조금씩 다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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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중 가전고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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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유 제147호(95. 6. 20) 전라북도 남원시 대강면 풍산리 207-1
이 문서는 조선중기부터 말기에 걸쳐 작성한 다양한 종류의 것들로, 밀양 박씨 집안에서 대를 이어 간직해 왔다. 그 중에는 나라에서 공신을 책봉하면서 내린 공신녹권(功臣錄券) 2건, 임금이 벼슬을 내리면서 발급한 임명장인 교지(敎旨) 11건, 청원서인 소지(所志) 6건, 관공문서인 완문(完文) 3건 등이 있다. 이 문서들은 민간인과 정부 및 관공서의 상관관계를 비롯해 조선후기의 사회상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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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화 백세영수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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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유 제148호(95. 6. 20) 전라북도 남원시 송동면 송기리 258
이 수첩은 고종 2년(1865) 이용화가 백살이 넘게 장수하자 이를 축하하여 원로대신과 조정백관 108인이 지어준 시문을 모은 것이다. 이 시문은 모두 지은이가 친필로 썼으며, 나라에서는 이용화에게 벼슬을 내려주기까지 했다. 수첩은 병풍형식의 한지 책자로 상하 두 권으로 나뉘며, 상권은 60매이고 크기는 35.5×50cm이다. 하권은 62매이고 크기가 34.8×50.2cm이다. 책자에 담긴 시문의 작자 가운데에는 유명 인사이자 명필이 많아, 이 수첩은 귀중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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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김씨 보판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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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유 제161호(98. 11. 25) 전라북도 남원시 향교동 1049-3
이 나무 판각은 경주김씨 수은공파(樹隱公派)의 족보를 펴내기 위해 제작한 것으로, 판각의 크기는 대체로 28cm×60cm이다. 1711년에 발간한 {신묘보(辛卯譜)}의 판각을 비롯하여 여러 후속편 족보의 판각 등 모두 314판이 남아 있다. 일반적으로 후속편 족보는 처음 발간한 족보와 마찬가지로 시조에서부터 시작하여 계보를 밝힌다. 하지만 수은공파의 후속편 족보는 맨처음 발간한 {신묘보} 이후에 출생한 후손만을 기록하는 특이한 방식을 취하였다. 수은공파의 시조인 수은공은 고려말 충신으로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는 것에 반대하여 두문동에 은둔하였으며, 후에 남원으로 낙향하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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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원치 마애불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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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유 제162호(98. 11. 25) 전라북도 남원시 이백면 양가리 5-3
여원치 정상 부근 바위에 새긴 이 불상은 고려 시대의 것으로 보인다. 불상 옆에는 운봉현감 박귀진(朴貴鎭)이 지은 글을 새겼다. 가슴아래 부분이 아직 땅속에 묻혀 있기는 하지만 머리부분을 제외하고는 보존상태가 비교적 좋은편이다. 조각수법이 평면적이어서 역동감은 없지만 넓은 어깨와 큰귀 또렷한 코는 시원한 느낌을 준다. 예전에는 불상의 보호각에 있었으나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있다. 글에 따르면 조선태조 이성계의 꿈에 한 노파가 나타다 이성계가 황산싸움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이 불상은 그 노파에게 감사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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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곡리 암각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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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유 제163호(98. 11. 25) 전라북도 남원시 대산면 대곡리 401
봉황대로 불리는 구릉의 정상 부근 암벽에 새긴 이 조각작품은 호남지방에서 드물 게 보이는 선사시대의 암각화이다. 암각화는 두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크기는 1∼2m 내외이며 상하 혹은 좌우 대칭으로 기하학적인 문양을 새겼다. 마모가 심하여 자세하지는 않지만, 사람이나 짐승의 얼굴을 묘사한 듯하다. 이 암각화는 1991년 처음으로 학계에 보고되었으며, 전북지방의 선사시대 문화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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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장암 보살좌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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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유 제166호(99. 4. 23)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 대정리 975
금동으로 만든 이 불상은 고려 말기의 작품이다. 1997년 도난 당했다가 되찾았으나, 불상 속에 있던 유물은 모두 없어지고 훼손도 심한 편이었다. 새로 도금하는 과정에서 불상의 얼굴모습이 약간은 변하였지만, 차분하고 부드러운 인상은 본래 그대로이다. 가슴에 보이는 화려한 문양의 목걸이가 눈에 띄며, 다리위에 늘어진 옷자락에도 화련한 구슬장식을 조각하였다. 옷주름에도 매우 세심한 배려를 한 작품으로, 고려 말기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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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산박씨 종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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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문화재 제 180호 (2000. 6. 23) 전라북도 남원시 수지면 호곡리 274
조선시대 양반 가옥의 특징을 간직한 이 저택은 박문수(朴門壽)의 후손들이 대대로 살아온 집이다. 박문수 는 고려말 충신으로 정몽주, 이색과 더불어 삼로(三老) 로 불리었으며,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는 것에 반대하여 두문동에 은둔하였다. 조선이 건국되자 그는 가족들을 이곳 호곡리로 내려보냈다. 그후 그의 후손들 은 줄곧 이곳에서 살았다. 이 집은 안채와 사랑채로 구성되었으며, 안채 동북쪽에는 박문수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 있다. <ㄷ>자형의 안채는 현종 7년(1841)에 지었으며, 사랑채는 18세기 말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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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장암(白丈庵) 소장(所藏) 범종(梵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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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문화재 제 211호 (2007. 2. 19) 전라북도 남원시 산내면 대정리 산28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211호로 지정된 백장암 범종은 1743년에 제작되었으며 전고(全高) 64cm, 종구(鐘口) 42cm의 규모로 그리 크지 않은 규모의 자그마한 종이다. 백장암 소장 법종은 전체적으로 신라계의 전통을 따르고 있으면서 조선시대의 양식이 혼합된 양식의 종으로 천판이 높게 솟아있는 봉긋한 형태와 음통 및 유곽과 보살상 등 전통적인 조선종의 형식을 따른 작품이다. 특히 용뉴가 소략하고 보살상이 형식화되었으며 연판이 간략화되는 등 일부 형식적인 면이 엿보이기는 하지만, 보존상태가 매우 양호하며 유려한 연화당초문의 조각수법, 전형적인 포탄형의 종신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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