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 장기려 博士

가난한 자와 함께한 장기려선생님
장기려 박사는 우리나라 외과 학회에서는 아주 뛰어난 업적을 남긴 외과 전문의였지만, 그의 인생은 너무나도 서민적이고 초라했다. 1995년 12월, 86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부산 복음 병원 원장으로 40년, 복음 간호 대학 학장으로 20년을 근무했지만, 그에게는 서민 아파트 한 채, 죽은 후에 묻힐 공동 묘지 10평조차 없었다.
장기려 박사는 언제나 매우 어려운 처지에서 사셨다. 물론, 병원 원장이나 대학 학장으로서의 수당은 있었겠지만, 그에게는 월급이나 수당보다는 가불이 많았다 .
여기에서 그의 수수께끼가 시작된다. 장 박사에 대해 떠도는 미신에 가까운 풍문 때문에 전국의 가난한 수술 환자들과 다른 병원에서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판정을 받은 말기 암 수술 환자들이 부산 복음 병원으로 몰려들었던 것이다. 겨우 입원을 하고 수술을 받아 병이 나으면 그 다음에는 또다른 문제가 생겼다. 그들 대부분은 입원비와 약값이 없었다. 이 때 마지막으로 찾아가는 곳이 원장실이었다.
원래, 잇속이 밝지않아 셈을 잘 할줄 모르고, 바보 같을 정도로 마음이 착한 장 박사에게 "시골 우리 집은 논도 밭도 없고 소 한 마리도 없는 소작농이어서 입원비나 치료비를 부담할 능력이 없습니다."라고 환자들이 하소연하면, 장 박사는 그들의 딱한 사정을 생각하고는 눈물겨워하였다.
병원비 대신에 병원에서 잡일을 하는 것으로 대신할 수는 없겠느냐는 환자들의 제안에 장 박사는 환자의 치료비 전액을 자신의 월급으로 대신 처리하고는 하였다. 병원 행정을 이렇게 하다 보니 장 박사의 월급은 항상 적자였고, 이것이 누적되면서 병원 운영도 어려워지게 되었다. 결국, 병원 회의에서 결정이 내려졌다. 앞으로 무료 환자에 관한 모든 것은 원장님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부장 회의를 거쳐 결정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가난한 환자들이 장 박사를 찾아오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모든 결정권을 박탈당한 이후부터 장 박사는 어려운 환자들이 생기면 야밤에 탈출하라고 알려주고는 하였다. "내가 밤에 살그머니 나가서 병원 뒷문을 열어 놓을테니 탈출하라."는 것이었다.
장 박사의 이러한 '바보 이야기'는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북녘에 두고온 아내와 가족에대한 그리움을 가슴에묻고 지낸 장기려 박사는 평생에 걸쳐 묵묵히 사랑을 실천한, 진실로 아름다운 예수의 사람이었다.
** 이산의 아픔 삭이며 희생과 봉사의 삶 살다간 참의사**
무료병원 운영과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통해 仁術을 펼친 명의 장기려, 그는 북녘에 두고 온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가슴에 묻고 지낸 민족분단의 희생자이기도 했다.
한국전쟁이 일어난지 4개월만인 1950년 10월 19일 유엔군과 국군은 평양을 탈환했다 당시 김일성의과대학 외과의사였던 장기려는 대학병원과 야전병원에서 부상병들을 치료하고 있었다. 그해 12월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국군은 평양을 철수하게 되고 이 때 장기려를 남으로 데려가기 위해 그를 야전병원 환자수송용 버스에 태웠다. 그것이 가족과의 45년에 걸친 긴 이별의 시작이 될 줄 몰랐다.
그는 언젠가 가족들을 만날거라는 희망 하나로 부산에서 피난살이를 시작했다.그러나 곧 다시 가족을 만날거라 했던 그의 바람은 길고 긴 분단의 세월속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장기려의 인생은 헤어진 가족을 향한 그리움으로 바쳐진 사랑과 기도였다.
"의사를 한번도 못보고 죽어가는 가난한 사람들을위해 평생을 바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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