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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어쩔 수 없는 걸까-가족의 탄생

마니쏘리 2010. 6. 11. 12:23

영화기자로서 짜릿한 순간은

사실 일년에 몇 번 되지 않습니다.

너무 많은 영화를 일로 보기 때문에

작품을 보면서 순수한 감동받기가 점점 어려워지지요.

 

그러다가 가슴을 뛰게 만드는 작품을 만나면 정말 기분 좋습니다.

특히 그 영화가 한국영화일 경우 더 그렇지요.

 

올해 처음 그런 영화를 만났습니다.

김태용 감독의 '가족의 탄생'입니다.

올 들어 한 번도 한국영화를 보면서

"아, 이거다!" 싶은 영화가 없었는데,

이 영화에서 올해 처음 그런 기분을 느꼈어요.

 

작은 티에는 괜히 토를 달고 싶지 않은 느낌,

무조건 편들고 싶은 느낌,

이 영화 보시라고 떠들고 다니고 싶은 느낌.

올해 이 정도 한국영화가 앞으로 두편만 더 나오면

2006년의 충무로에 대해서 저는 더 이상 바랄 게 없습니다.

 

이 영화 보러들 가시라는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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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들어 꼬박 다섯 달을 기다려야 했다.

가족의 탄생의 개봉은

2006년 한국영화가 가장 밝게 빛을 낸 순간 중 하나로 기록될 것이다.

 

스크린 속으로 스산한 바람을 불러들여

내내 쓸쓸하게 만들다가

마지막 15분간 풍성한 햇살을 비추는 이 가족영화는

삶이란 노력과 의지에 따라

얼마든지 만들어갈 수 있는 것이라고

관성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가족은 어떤 갈등도 극복할 수 있는 사랑의 공동체라고

애써 우기지도 않는다.

그러나 탄식을 거둔 뒤에야

비로소 말을 걸어오기 시작하는 이 영화의 낮은 목소리에는

삶의 비늘을 벗기는 힘이 담겨 있다.

 

모두 3부로 구성된 이 영화에는

세가지 이야기가 들어 있다.

미라(문소리)는 몇년만에 돌아온 남동생 형철(엄태웅) 곁에

스무살 연상의 아내 무신(고두심)이 함께 있는 것을 보고 당황한다.

여러 남자를 거치면서 살아가는 엄마 매자(김혜옥)에 대해

애증의 감정을 갖고 있는 선경(공효진)은

떠나간 남자친구 준호(류승범)를 우연히 고궁에서 만난다.

경석(봉태규)은 애인 채현(정유미)이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잘해주느라

정작 자신에게 집중하지 않자 속을 끓인다.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

공포영화가 담아낼 수 있는 감성의 극점을 찍었던 김태용 감독은

7년만의 신작에서 다시금 빼어난 연출력을 발휘했다.

관습을 넘어서는 설정과

예상을 뛰어넘는 결말을 지닌 화술이 흥미진진하고,

일곱명에 이르는 주요 인물 하나하나를

생생히 살려낸 캐릭터 조형술이 탁월하다.

복잡한 전사(前史)를 너저분하게 늘어놓지 않은 채,

조각난 편린 속에 전체를 담아내고

스쳐가는 스케치로 본질을 요약하는 디테일은

더없이 훌륭하다.

선명한 주제의식은 지적으로 과도하지 않고,

종반에 가서 세 이야기를 효율적으로 엮어내는 구조는

형식적으로 과시적이지 않다.

 

형철이 술 마시러 떠난 후

두 여자가 마루에서 묵묵히 식사하는 모습과

어린아이가 마당에서 뛰노는 모습을

하나의 구도 안에 서로 다른 시간 흐름 방식으로 표현한 장면은

영화라는 매체가 시간을 봉인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방식의 한 예를 보여준다.

 

이외에도 기차가 터널을 통과할 때나

아파트 복도의 센서등(燈)이 켜지고 꺼질 때처럼

교차하는 빛과 그림자로

공존의 환희와 부대낌의 권태가 교차하는

인물들의 관계를 상징하는 방식처럼

인상적인 장면들이 적지 않다.

가족의 탄생에는 비범한 영화들이 가지게 마련인 장점들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그리고 좋은 배우들의 좋은 연기가 있다.

이 작품 출연진은 앙상블과 개인 기량 모두에서 뛰어나지만,

그 중에서도 공효진의 잊지 못할 정도로 훌륭한 연기는

특별히 따로 기록해둘 만 하다.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니?

갈등이 극에 달할 때

이 영화의 인물들은 너나 없이 이와 비슷한 말을 외친다.

가족이든 연인이든,

가장 아프게 만드는 것은

언제나 가장 가까운 사람이다.

 

그러나 정말 어쩔 수 없는 걸까.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관계란 없다는 것.

우리가 운명이라고 믿는 많은 것들이 실은 취향이라는 것.

그리고 삶을 사는 방식은 단 하나가 아니라는 것.

사랑스럽고 웅숭깊은 이 가족영화는

오래도록 기억되고 인용될 것이다.

 

 

 '이동진의 언제나 영화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