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박물관'으로 불리는 개성에는 정몽주가 방원에 의해 피살됐던 선죽교를 비롯해 고려박물관,왕건왕릉,공민왕릉 등 고려시대의 유물과 유적이 즐비하다. 개성은 서울에서 50㎞,평양에서 180㎞로 오가는 길에 개성공단을 통과한다.
선죽교는 정몽주가 살던 숭양서원 아래에 위치한 조그마한 돌다리로 정몽주가 죽은 후 충절을 뜻하는 대나무가 솟아 선지교에서 선죽교로 개명했으나 지금은 대나무 대신 키 작은 시누대가 자라고 있다. 선죽교의 화강암에 함유된 철분이 산화작용에 의해 붉게 변해 정몽주의 선혈이 배인 것처럼 선명하다. 1000여점의 고려시대 유물이 전시된 고려박물관에는 금속활자 고려청자 등 귀중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관광객들이 이용하는 식당은 통일관과 영통식당,자남산여관식당,민속식당 등 4곳으로 개성약밥과 인절미를 기름에 튀겨 조청을 묻힌 우메기를 개성 최고의 별미로 꼽는다.
현대아산은 2일과 7일 시범관광을 두 차례 더 가진 뒤 일반 관광객을 상대로 본격적인 개성관광을 실시한다. 아울러 개성관광 일정도 향후 당일은 물론 1박2일,2박3일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선보이고 관광비용도 시범관광보다 낮출 계획이다(02-3669-3000).
누가 남남북녀라고 했던가.
박연폭포,화담 서경덕 선생과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로 칭송 받았던 자네의 재색은 500년 후 고려박물관과 박연폭포에서 수줍음 타면서도 당당한 표정으로 남쪽의 첫 관광객들을 맞던 개성 처녀들의 미모만 봐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네.
이른 아침 군사분계선을 넘자마자 곧장 자네가 거문고를 타고 시조도 지었다는 박연폭포를 찾고 싶었지만 인간 세상사가 어디 마음먹은 대로 되던가.
차창 밖으로 스쳐가는 평화로운 들녘과 군인들의 굳은 표정이 만들어내는 부조화는 남과 북이 다르지 않네 그려. 그나마 가던 걸음 멈추고 반갑게 손을 흔들어 주는 개성 주민들의 따뜻함에 조선 최고의 명기라는 자네와의 만남이 한식경 쯤 늦어지는 것을 겨우 위안 삼았다네.
600년이란 세월이 흘렀건만 아직도 고려 충신 정몽주의 핏빛이 지워지지 않은 선죽교에선 싱겁게도 행여 자네의 흔적이라도 남아 있을까봐 흔적을 찾아 이리 저리 배회했고,고려박물관으로 간판을 바꿔 단 고려시대 성균관에서는 1000년 묵은 느티나무 그늘 아래서 자네가 새하얀 명주수건으로 땀을 훔쳤음직한 모습을 객쩍게 떠올렸다네.
뿐만이 아닐세. 자남산여관에선 개성약밥과 찹쌀가루로 만든 우메기로 차린 정갈한 상을 받아들고도 자네 없음을 한탄하며 먹는 둥 마는 둥 박연폭포 오르기만을 일각 여삼추의 심정으로 애태웠다네.
박연폭포를 찾아 가는 길은 한 폭의 두루마리 그림이었다네. 자네의 어깨선처럼 부드러운 옥수수밭 사이 도로를 달리자 남쪽의 인삼밭에서는 오래전에 사라진 볏짚 해가림망이 반갑고 산자락에 드문드문 둥지를 튼 농가들은 지붕마다 커다란 호박을 짊어진 채 한층 높아진 초가을의 푸른 하늘 아래서 정담을 나누고 있었다네.
드디어 자네가 자주 찾았다는 박연폭포가 지척인가 보이. 천마산과 성거산의 험준한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물줄기가 바가지 모양으로 패인 박연 연못에서 37뻍 아래의 고모담으로 낙하하는 소리가 어찌 들으면 천둥 같기도 하고 자네의 청아한 목소리를 같기도 해 폭포를 가린 나뭇잎도 가늘게 떨고 내 가슴도 쿵쾅거렸다네.
자네가 살아 돌아온 듯 너무 반가워 단숨에 폭포 아래 다리로 연결된 커다란 용바위에 올랐다네. 하늘에서 쏟아지는 하얀 물줄기는 선녀의 치맛자락인 듯 눈부시고 사방으로 흩날리는 물보라는 진주알처럼 영롱하구나.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박연폭포의 위용이 겸재 정선의 ‘박연폭포’와 어찌나 닮았는지 마치 내가 그림 속으로 걸어 들어간 느낌이었다네.
‘날아 흘러 삼천척을 떨어지니 하늘에서 은하수가 내리는가 의심이 되는구나(飛流直下 三千尺 疑視銀河 洛九千)’
비취색 고모담에서 막 목욕을 끝낸 자네가 박연폭포의 아름다움에 반해 젖은 머리채에 붓을 묶어 휘갈겨 썼다는 용바위의 시구를 뉘라서 흉내라도 내겠는가.
하기야 10년 동안 면벽수도한 지족선사를 단숨에 파계시키고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일도창해 하면 다시 오기가 어려오니/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여간들 엇더리’라며 종실 선비인 벽계수를 우롱할 정도였으니 자네의 재색과 기예를 새삼 말해 무엇 하겠는가.
하지만 자네의 재색도 서경덕 선생에겐 통하지 않았다지. 연분홍 저고리의 옷고름을 슬며시 풀고 은근슬쩍 유혹의 눈길을 보내도 서경덕 선생은 마치 자네 보기를 돌같이 여겼으니 자넨들 얼마나 자존심 상했을까. 하지만 알량한 자존심일랑 헌신짝처럼 버리고 선생을 스승 삼아 화담초막을 드나들며 글을 익혔으니 자네만한 여장부가 조선팔도 어디에 또 있을까.
‘마음이 어리석은 후이니 하는 일이 다 어리석다/만중운산에 어느 님이 올까마는/지는 잎 부는 바람소리에 행여 그이인가 하노라’
목석같던 스승도 연모의 정을 담은 시조를 읊조린 것을 보면 결국은 자네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나 진배 아니던가. 살아생전 못 다한 정을 나누고파 그대가 스승 옆에 묻혔는가,스승이 그대 옆에 잠들었는가.
서쪽으로 약간 기운 초가을 햇살이 박연폭포 오른쪽의 법사정으로 쏟아지는데 무정하게도 벌써 이별할 시간이 되었다네. 고이 잠든 자네의 무덤 찾아 술 한 잔 권하고 싶지만 사정이 허락하지 않네 그려. 내 언젠가 황진이 자네 무덤 찾을 날을 고대하며 평안도사 임제가 자네의 무덤에 술을 뿌리며 읊었다는 시조 한 수를 내 마음인양 읊조려보겠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웠난다/홍안을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나니/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설워 하노라’
개성=글·사진 박강섭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