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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열린 북녘 개성 여행 정보

마니쏘리 2010. 3. 28. 00:23

새로 열린 북녘 개성 여행 정보
2007.05.16 16:32
http://tong.nate.com/lgc711/37759727
출처 블로그 > 여울의 블로그

 

새로 열린 북녘 개성 박연폭포
진이 뿌지친 화담도 너한테 반할수 밖에…
이병학 기자
▲ 개성 북쪽 천마산 자락 오조천 상류에 걸린 박연폭포. 범사정 밑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폭포 밑의 소가 고모담, 왼쪽에 보이는 바위가 용바위다. 박연은 폭포 위에 있는 바가지를 닮은 소를 말한다.

개성 관광의 매력은, 북녘 주민의 생생한 표정과 맞닥뜨린다는 데 있다. 북녘 도시의 거리를 둘러보며, 남·북 주민이 서로 손 흔들고 웃고 고개 숙여 인사한다는 것. 중국을 거치는 백두산 관광이나, 육로를 통한 최근의 금강산 관광에서도 생각할 수 없던 일이다. 지난 26일 개성 시범관광을 시작으로, 남북의 일반 주민이 서로 눈 맞추며 55년간 굳어온 표정을 풀 수 있는 실질적인 자리가 마련된 셈이다. 이런 매력의 전후 좌우로, 한때 우리 역사의 중심지였던 고색창연한 도시 유적과 선인들의 체취가 밴 아름다운 경치들이 펼쳐진다.

예성강은 개성땅 서쪽에 있다. 하류엔 고려시대 무역항 벽란도가 있었다. 고려가 송·일본·아라비아 등과 문물을 교역하던 국제 무역항이다. 벽란도에서 길을 따라 이어진 가게들의 처마 밑을 걸으면, 비를 맞지 않고 개경까지 갈 정도로 무역이 번성했다고 한다.

이 예성강의 한 지류가 개성의 북쪽 천마산 기슭에서 발원한다. 산 북쪽으로 흘러내리는 오조천이다. 박연폭포는 바로 오조천 최상류 바위자락에 걸려 있다. 개성 중심지에서 직선 거리로 14㎞, 길을 따라선 25㎞ 지점이다. 시범관광을 함께 한 개성 출신 남쪽 실향민들은 “개성에서 40리 산길을 몇 시간씩 걸어서 폭포 구경을 왔었다”고 말했다. 지금은 차로 30분, 개성~평양 고속도로를 타고 9㎞쯤 가다 빠져나와 포장길을 15㎞ 달리면 닿는다.

박연폭포 가는 길은 부드러운 초록빛에 둘러싸인, 나무가 드문 구릉지들과 그림처럼 펼쳐진 논, 옥수수밭·콩밭·인삼밭이 반겨준다. 주민들은 옥수수를 수확하다가, 소를 며 쟁기질을 하다가 남녘의 관광 버스를 향해 먼저 손을 흔들기도 한다. 나무 없는 야산이 안타까워보일 무렵 숲이 울창해지면서 깨끗한 물줄기 오조천을 만난다.

그리운 얼굴들에 눈 맞추고
거센 부채살 물살 장관이라
용바위 글씨는 뉘 작품인가
관음사 보살님이 아실런가

▲ 박연폭포 앞 용바위에 새겨진 한시들. 오른쪽 초서가, 이백의 시구를 황진이가 머리채로 썼다는 ‘비류직하삼천척…’, 왼쪽은 ‘이산()’이란 이가 쓴 ‘백시황필양웅재…’의 일부다.
주차장에서 새로 깐 아스팔트길을 따라 잠시 오르면 마침내 숲 사이로 굉음과 함께 박연폭포의 거센 물보라가 모습을 드러낸다. 금강산 비룡폭포(높이 50m), 설악산 대승폭포(높이 88m)와 함께 국내 3대 명폭의 하나로, 높이 30m 가까운 웅장한 폭포다(알려지기는 32~37m). 꼭대기 급경사 바윗자락을 미끄러진 물줄기가, 절벽을 만나 수직으로 낙하하며 거센 물보라를 일으킨다. 옆에서 보면 물살이 부챗살처럼 퍼지며 쏟아져 더욱 장관이다.

폭포 아래 지름 40m쯤의 소가 고모담. 지름 8m의 박연은 폭포 위쪽에 있다. 바가지처럼 생긴, 푸르고 깊은 박연 한가운데엔 커다란 바위(섬바위)가 놓여 있어 이채롭다. 박씨 성을 가진 진사가 이 바위에서 피리를 불자, 물속에 살던 용왕의 딸이 반해 용궁으로 데려가 함께 살았다 하여 박연이란 이름이 붙었다. 박씨 어머니가 아들을 찾다 떨어져 죽었다는 폭포 아래의 소가 고모담(시어미소)이다.



송도중학 시절 박연폭포에 두번 왔었다는 실향민 황성경(79)씨는 “어릴 때 박연의 밑바닥 구멍이 서해 바다로 뚫려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지금 보니 다 메워진 것 같아 아쉽다”고 말했다. 박연 옆엔 가뭄 때 기우제를 지내던 사당이 있었다.

감동에 젖은 실향민들이 폭포 앞에서 한입으로 꺼내드는 얘기는 ‘송도삼절’이다. 박연폭포의 절경, 유학자 화담 서경덕의 기품과 절개, 황진이의 절색을 일컫는 말(송도는 개성의 옛 이름)이다. 30년 면벽을 하던 지족암의 선사를 파계시킨 절색 황진이도, 황진이의 유혹을 뿌리친 서경덕도 폭포를 자주 찾아 경관을 즐겼다.

▲ 박연폭포 위쪽에 있는 대흥산성의 북문. 잘 보전된 고려시대 성문이다. 범사정을 지나 숲길을 오르면 나온다.
폭포 주변엔 황진이와 서경덕 얘기가 얽힌 곳이 많다. 고모담 물속에 솟은 바위가 용바위다. 숱한 한자 이름들이 처발라진, 이 바위엔 크고 유려한 초서체로 ‘비류직하삼천척 의시은하락구천(나는 듯 흘러내려 삼천척을 떨어지니 하늘에서 은하수가 쏟아져내리는 듯하구나)’이란, 이백의 시 ‘여산폭포를 바라보며’ 중 두 구절이 새겨져 있다. 황진이가 머리채에 먹을 적셔 휘둘러 썼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이 시 위쪽엔 ‘백시황필양웅재’(이백 시와 황진의 필체 다 뛰어나도다)로 시작되는 시도 적혀 있다.

초서 글씨는 조선 중기의 시인이자 유람가인 봉래 양사언의 글씨가 아닐까 싶다(양사언은 금강산 만폭동의 ‘봉래풍악원화동천’, 설악산 대승폭포 앞 반석의 ‘구천은하’, 동해 무릉계곡 반석의 ‘무릉선경 중대천석 두타동천’ 등 명승마다 대형 초서 글씨를 새겼다). 황진이는 오히려 중국 명승을 끌어들이는 시구절을 비꼬듯 ‘여산폭포만 좋다고 마라, 해동의 박연이 으뜸이라’는, 자주적인 내용의 한시(박연폭포시)를 남기고 있다. 여산폭포는 중국 강서성 구강현의 여산에 있는 높이 120m의 3단폭포다.

어찌됐든, 용바위의 글씨는 폭포수 물줄기처럼 유려하고, 바위 맞은편 언덕의 정자 범사정은 날아갈 듯 앉아 있어 폭포 주변 경관을 한단계 끌어올려 준다. 범사정은 ‘박연폭포 흘러내리는 물은 범사정으로 감돌아든다…’로 시작하는 개성 민요 ‘박연폭포(개성난봉가)’의 그 범사정이다. 서경덕이 공부하며 머물던 정자인 서사정은 폭포 하류 쪽에 따로 있었다고 한다. 황진이가 서경덕을 유혹하던 곳이다. 북측 안내원은 “서경덕 무덤과 황진이 무덤은 영통사 가는 길에, 서로 2~3㎞ 떨어져 자리잡고 있다”고 전했다.

범사정 위로 울창한 숲길을 따라 오르면 아치형 축대와 문루가 아름다운 대흥산성 북문이 나오고, 문 지나 왼쪽 바위를 끼고 돌면 폭포 위에 아찔하게 놓인 박연을 만난다. 대흥산성은 고려때 천마산·성거산·청량봉·인달봉 등에 걸쳐 쌓은 둘레 10㎞의 돌성이다. 북문에서 10분쯤 더 가면 970년 창건된 고찰 관음사가 있다. 관음굴에 있던 정교한 대리석 관음보살상은 고려박물관으로 옮겼다. 박연천 물길을 따라 더 오르면 고찰 대흥사 터가 있다고 한다.

관음사까지의 아름다운 숲길 산책 뒤에 내려와, 범사정에 걸터앉아 다시 박연폭포를 만난다. 폭포는, 멀리서 어렵게 찾아온 나그네의 아쉬운 눈길에 화답하듯, 새로 흘러온 물줄기의 웅장한 물보라를 가슴에 퍼부어 주었다.

박연폭포(개성)/글·사진 이병학 기자 leebh99@hani.co.kr


12지신상 앞세운 왕건릉·포은 스러진 선죽교 ‘오롯이’

우리의 첫 통일국가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엔 수많은 역사 유적지가 흩어져 있다. 시범관광 일정에 든 개성의 주요 문화유적지들을 알아본다.


고려박물관=고려성균관 안에 있다. 고려성균관은 우리나라 최초의 대학으로, 고려 992년에 세워진 국자감의 후신이다. 고려 문종때 대명궁이라는 별궁이 있던 자리에, 1089년 국자감이 옮겨왔고 1308년 성균관으로 개칭했다. 1988년부터 고려시대 유물들을 한데 모은 고려박물관으로 쓰고 있다. 마당에 500살이 넘은 은행나무 두 그루와 느티나무 한 그루가 널찍한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내부 건물을 4개의 전시관으로 꾸며 1000여점의 유물을 전시중이다. 고려청자들과 11세기의 금속활자, 사신도·선녀상 등이 섬세하게 조각된 돌관, 적조사 쇠부처, 청동종·징·화로 등이 실내에, 불일사오층석탑·흥국사탑·헌화사칠층탑, 각종 부도·석등 등 고려때 돌조각품들이 야외에 전시돼 있다.

왕건왕릉·공민왕릉=왕건릉엔 고려 태조 왕건과 왕비 신혜왕후의 무덤이 있다. 3단 축조된 무덤 둘레의 문무인상, 12지신상 등 석조물이 볼만하다. 최근엔 능에서 청동 왕건조각상이 출토됐다. 공민왕릉엔 공민왕과 부인 노국공주의 무덤이 있다. 3단 축조된 무덤엔 단마다 호랑이 등의 동물상, 문인상과 석등, 무인상 등이 도열해 있다. 우리나라 능표조각의 걸작으로 꼽힌다. 내부엔 무덤 모형과 벽화가 전시돼 있다.

숭양서원=정몽주가 살던 집터에 세운 사립 교육기관이다. 학생들의 숙소이던 동·서재, 강당, 정몽주 초상을 모신 사당 문충당 등이 있다.


선죽교=숭양서원 부근에 있는 길이 6.7m, 폭 2.5m의 작은 돌다리. 정몽주가 이방원의 군사에 의해 살해된 곳이다. 죽은 자리에서 대나무가 돋아났다 해서 선죽교다. 1780년 개성 유수로 부임한 후손 정호인이 다리에 난간을 설치해 통행을 막고, 옆에 새 돌다리를 놓았다. 다리 옆에 한석봉이 쓴 선죽교비, 하마비, 충절을 기리는 성인비 비각 등이 있고, 다리앞 길 건너 건물엔 조선 영조와 고종 때 세운 두 개의 표충비가 있다.

남대문=직접 살펴볼 수는 없지만, 개성 시내에 있어 관광지 오가는 길에 차 안에서 볼 수 있다. 본디 고려말 내성(반월성)의 남문이다. 육이오때 미군 폭격으로 불탄 것을 5년 뒤 복원했다. 현판은 한석봉의 글씨다. 누각엔 연복사에서 옮겨온 종(1346년 주조)이 걸려 있다. 소리가 백리를 간다는, 국내 5대 명종의 하나다.

이병학 기자

개성 여행정보=개성은 서울에서 78㎞, 판문점에서 12㎞ 거리에 있다. 자유로를 달려 임진강 통일대교 건넌 뒤 남측출입사무소~휴전선~북측사무소를 거쳐 개성 봉동 개성공업지구 거쳐 시내로 들어간다. 관광지역 이외 지역이나 이동중 촬영은 금지된다. 2차, 3차 개성 시범관광은 9월2일, 7일 진행된다. 당일 일정인 까닭에 시간 제약을 받아, 여러 볼거리들을 차수별로 안배했다. 2, 3차 관광에선 박연폭포가 일정에서 빠지고 영통사와 왕건릉·공민왕릉이 추가된다. 성균관(고려박물관)·선죽교·개성민속여관 등 관광은 공통 일정이다. 일반인의 개성 관광 시기는 시범관광 문제점을 보완해, 남북 협의로 정해진다. 현대아산쪽은 당일 관광요금 19만5000원이 비싸다고 보고, 낮출 것을 검토하고 있다. 북쪽이 요구하는 관광 대가(1인당 150달러) 협상 등이 걸림돌로 남아 있다. 점심식사는 선죽교 옆의 전통음식점인 자남산여관, 개성 정식인 반상기를 내는 통일관과 영통식당 등에서 한다.·은행을 곁들인 개성약밥, 찹쌀을 기름에 튀겨 꿀에 재어 내는 우메기, 닭고기 장과, 녹두지짐 등 개성 요리를 봉학맥주·영통소주·신덕산샘물 등을 곁들여 맛볼 수 있다. “개성 깍쟁이라고 하는데, 깍쟁이는 가게쟁이에서 나온 말입네다. 그만큼 가게가 많았다는 얘기야요. 사실은 개성 사람들은 깍쟁이 아닙네다.” 개성의 관광 안내원이나 물품 판매원들이 강조해 마지않는 얘기.

<한겨레>

 

 

開城,헤어진 해 손꼽다 보니 다시볼 날 손꼽아 기다리네


'고려의 박물관'으로 불리는 개성에는 정몽주가 방원에 의해 피살됐던 선죽교를 비롯해 고려박물관,왕건왕릉,공민왕릉 등 고려시대의 유물과 유적이 즐비하다. 개성은 서울에서 50㎞,평양에서 180㎞로 오가는 길에 개성공단을 통과한다.

선죽교는 정몽주가 살던 숭양서원 아래에 위치한 조그마한 돌다리로 정몽주가 죽은 후 충절을 뜻하는 대나무가 솟아 선지교에서 선죽교로 개명했으나 지금은 대나무 대신 키 작은 시누대가 자라고 있다. 선죽교의 화강암에 함유된 철분이 산화작용에 의해 붉게 변해 정몽주의 선혈이 배인 것처럼 선명하다. 1000여점의 고려시대 유물이 전시된 고려박물관에는 금속활자 고려청자 등 귀중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관광객들이 이용하는 식당은 통일관과 영통식당,자남산여관식당,민속식당 등 4곳으로 개성약밥과 인절미를 기름에 튀겨 조청을 묻힌 우메기를 개성 최고의 별미로 꼽는다.

현대아산은 2일과 7일 시범관광을 두 차례 더 가진 뒤 일반 관광객을 상대로 본격적인 개성관광을 실시한다. 아울러 개성관광 일정도 향후 당일은 물론 1박2일,2박3일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선보이고 관광비용도 시범관광보다 낮출 계획이다(02-3669-3000).

누가 남남북녀라고 했던가.

박연폭포,화담 서경덕 선생과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로 칭송 받았던 자네의 재색은 500년 후 고려박물관과 박연폭포에서 수줍음 타면서도 당당한 표정으로 남쪽의 첫 관광객들을 맞던 개성 처녀들의 미모만 봐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네.

이른 아침 군사분계선을 넘자마자 곧장 자네가 거문고를 타고 시조도 지었다는 박연폭포를 찾고 싶었지만 인간 세상사가 어디 마음먹은 대로 되던가.

차창 밖으로 스쳐가는 평화로운 들녘과 군인들의 굳은 표정이 만들어내는 부조화는 남과 북이 다르지 않네 그려. 그나마 가던 걸음 멈추고 반갑게 손을 흔들어 주는 개성 주민들의 따뜻함에 조선 최고의 명기라는 자네와의 만남이 한식경 쯤 늦어지는 것을 겨우 위안 삼았다네.

600년이란 세월이 흘렀건만 아직도 고려 충신 정몽주의 핏빛이 지워지지 않은 선죽교에선 싱겁게도 행여 자네의 흔적이라도 남아 있을까봐 흔적을 찾아 이리 저리 배회했고,고려박물관으로 간판을 바꿔 단 고려시대 성균관에서는 1000년 묵은 느티나무 그늘 아래서 자네가 새하얀 명주수건으로 땀을 훔쳤음직한 모습을 객쩍게 떠올렸다네.

뿐만이 아닐세. 자남산여관에선 개성약밥과 찹쌀가루로 만든 우메기로 차린 정갈한 상을 받아들고도 자네 없음을 한탄하며 먹는 둥 마는 둥 박연폭포 오르기만을 일각 여삼추의 심정으로 애태웠다네.

박연폭포를 찾아 가는 길은 한 폭의 두루마리 그림이었다네. 자네의 어깨선처럼 부드러운 옥수수밭 사이 도로를 달리자 남쪽의 인삼밭에서는 오래전에 사라진 볏짚 해가림망이 반갑고 산자락에 드문드문 둥지를 튼 농가들은 지붕마다 커다란 호박을 짊어진 채 한층 높아진 초가을의 푸른 하늘 아래서 정담을 나누고 있었다네.

드디어 자네가 자주 찾았다는 박연폭포가 지척인가 보이. 천마산과 성거산의 험준한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물줄기가 바가지 모양으로 패인 박연 연못에서 37뻍 아래의 고모담으로 낙하하는 소리가 어찌 들으면 천둥 같기도 하고 자네의 청아한 목소리를 같기도 해 폭포를 가린 나뭇잎도 가늘게 떨고 내 가슴도 쿵쾅거렸다네.

자네가 살아 돌아온 듯 너무 반가워 단숨에 폭포 아래 다리로 연결된 커다란 용바위에 올랐다네. 하늘에서 쏟아지는 하얀 물줄기는 선녀의 치맛자락인 듯 눈부시고 사방으로 흩날리는 물보라는 진주알처럼 영롱하구나.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박연폭포의 위용이 겸재 정선의 ‘박연폭포’와 어찌나 닮았는지 마치 내가 그림 속으로 걸어 들어간 느낌이었다네.

‘날아 흘러 삼천척을 떨어지니 하늘에서 은하수가 내리는가 의심이 되는구나(飛流直下 三千尺 疑視銀河 洛九千)’

비취색 고모담에서 막 목욕을 끝낸 자네가 박연폭포의 아름다움에 반해 젖은 머리채에 붓을 묶어 휘갈겨 썼다는 용바위의 시구를 뉘라서 흉내라도 내겠는가.

하기야 10년 동안 면벽수도한 지족선사를 단숨에 파계시키고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일도창해 하면 다시 오기가 어려오니/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여간들 엇더리’라며 종실 선비인 벽계수를 우롱할 정도였으니 자네의 재색과 기예를 새삼 말해 무엇 하겠는가.

하지만 자네의 재색도 서경덕 선생에겐 통하지 않았다지. 연분홍 저고리의 옷고름을 슬며시 풀고 은근슬쩍 유혹의 눈길을 보내도 서경덕 선생은 마치 자네 보기를 돌같이 여겼으니 자넨들 얼마나 자존심 상했을까. 하지만 알량한 자존심일랑 헌신짝처럼 버리고 선생을 스승 삼아 화담초막을 드나들며 글을 익혔으니 자네만한 여장부가 조선팔도 어디에 또 있을까.

‘마음이 어리석은 후이니 하는 일이 다 어리석다/만중운산에 어느 님이 올까마는/지는 잎 부는 바람소리에 행여 그이인가 하노라’

목석같던 스승도 연모의 정을 담은 시조를 읊조린 것을 보면 결국은 자네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나 진배 아니던가. 살아생전 못 다한 정을 나누고파 그대가 스승 옆에 묻혔는가,스승이 그대 옆에 잠들었는가.

서쪽으로 약간 기운 초가을 햇살이 박연폭포 오른쪽의 법사정으로 쏟아지는데 무정하게도 벌써 이별할 시간이 되었다네. 고이 잠든 자네의 무덤 찾아 술 한 잔 권하고 싶지만 사정이 허락하지 않네 그려. 내 언젠가 황진이 자네 무덤 찾을 날을 고대하며 평안도사 임제가 자네의 무덤에 술을 뿌리며 읊었다는 시조 한 수를 내 마음인양 읊조려보겠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웠난다/홍안을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나니/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설워 하노라’

개성=글·사진 박강섭기자 kspark@kmib.co.kr

<국민일보>

 

 

개성, 1000년 비경도… 50여년 닫힌 마음도 활짝 열다

스포츠조선 개성=글ㆍ사진 김형우 기자

▲ 송도삼절의 하나인 박연폭포의 장대한 물줄기가 보는 이의 가슴을 후련하게 해준다.
반세기만에 열린 개성 길은 향수를 자극하기 충분했다. 푸르른 벌판 사이로 굽이치며 아스라히 사라져 가는 황톳길 하며, 호박덩굴 얹혀진 지붕, 그리고 자전거를 타거나 총총 걸음으로 내왕하는 사람들의 차림새…. 옛 거리를 재현해둔 것만 같은 시내는 과거 속으로 시간여행을 떠나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3~7층짜리 아파트와 10층 남짓 건물 사이로 간간히 비치는 어지러운 구호들이 현실을 깨닫게 할 뿐.

서울 지척, 하지만 55년이라는 시차는 이처럼 개성 관광단에게 또 하나의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개성은 사람 냄새 풍기는 관광지였다. 일상의 주민들을 차창 너머로 나마 볼 수 있다는 게 시골풍경 일색인 금강산과의 차이다. 병풍처럼 둘러싸인 송악산 자락 아래 성균관과 선죽교, 숭양서원 등 유적이 산재해 있고 송도삼절(松都三絶)의 하나라는 박연폭포의 장쾌한 물줄기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개성 가는 길, 개성의 모습 = 제1차 개성시범 관광을 시작한 지난 달 26일 오전 6시. 실향민 등 500명의 관광단을 태우고 경복궁을 출발한 15대의 관광버스가 여명을 헤치고 자유로를 내달렸다. 오전 8시. 도라산 남측 출입사무소(CIQ)를 거쳐 8시20분 군사분계선을 넘어섰다. 교과서속 '철마는 달리고 싶다'의 바로 그 녹슨 기차도 보였고, 북측 최남단 기정동 마을도 눈에 들어 온다. 남방한계선, 북방한계선 등 DMZ(비무장지대)를 통과, 북측 CIQ에서 멈췄다. 일종의 입국 심사. 철저한 짐검사가 이뤄졌지만 검사원의 태도는 부드러웠다.

8시45분. 출입국 절차가 끝난 관광단 행렬이 4차선 경의선 도로에 올랐다. 개성까지는 13km. 전날 내린 비가 그친 북녘의 산하는 또렷했다. 동승한 북한 관광총회사 소속 북측 안내원 문광철씨가 바빠지기 시작했다. "저기 보십시오. 아름다운 처녀가 누워 있는듯한 송악산이 보입니다."


선죽교 '충신의 피'가…
"어디요?" "와!" 하는 관광객들의 탄성과 함께 이내 터져나오는 탄식. "이렇게 가까운 것을… 55년이 걸렸어…."

한 관광객의 재미난 반문이 긴장된 분위기를 털어냈다. "근데 저 송악산 처녀 이상합니다. 배가 불룩해요. 혹시 바람난 처녀 아닙니까?"

일순 차안은 웃음 바다를 이뤘다. "직접 한 번 물어 보십시오."

15분쯤 달리니 개성 시내 초입이다. 서울 출발 2시간50여분 만이다. 때마침 늦은 출근 시간. 행인들이 눈에 띄었지만 시내는 한산했다. 자동차도 흔치 않았다. 대신 자전거가 많았다. 곳곳에 격렬한 구호도 붙어 있었다.

고려약국, 닭곰집, 통일다리식당, 아동백화점, 과실남새상점 등 일상을 보여주는 시가 모습이 마치 낡은 활동사진을 돌리는 듯했다. '효녀''임꺽정' '조선의 별' 등을 상영하고 있는 개성영화관도 눈에 띄었지만 인적은 드물었다.

개성시내의 건물은 3~5층짜리가 많았다. 이따금 10층 이상 고층 아파트도 보였다. 아파트 발코니와 창틀에는 한결같이 화사한 화분이 놓여 있었다. 하얀 페인트를 칠한 낡은 아파트벽과 청색 창틀, 그리고 꽃의 조화가 얼핏 남유럽의 한 주택가 골목을 떠올리게 한다. 낡았지만 깔끔한 도시를 활보하는 시민들의 모습은 밝고 활기찼다. 방문단 차를 향해 흔드는 손인사도 어색하지 않았다.


성균관 '고려역사' 가득
▶개성의 볼거리 = 개성 관광의 첫번째 코스는 고려박물관. 고려 성균관 유적이 박물관인 셈이다. 명륜당, 동재, 서재 등이 모두 전시실로 꾸며져 있다. 972년 짓고 임진왜란 때 소실돼 1602년부터 8년간 복구했다는 1000년 전통 고려성균관의 유지복원 정도는 기대 이하였다.

하지만 고려시기 역사 유물 1000여점이 전시돼 고려의 문화유적을 접하는 보고에 다름 없는 곳이다. 고려왕궁 만월대 터에서 발굴된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고려청자, 사신도가 그려진 석관 등 값진 유물들이 전시돼 있었다.

박물관 다음은 선죽교. 선죽교는 이방원이 고려 충신 정몽주를 살해한 장소. 다리는 길이 8.35m, 폭 3.3m로 생각보다 작았고, 아래로는 물길이 갇혀 있었다. 난간 앞뒤를 막아 관광객들은 선죽교 옆에 가설한 돌다리 위에서 구경해야 한다. 다리 한켠에 흐릿하게 붉은 자국이 보였다. 북측 안내원은 "정몽주를 기리기 위해 철이 함유된 화강암을 넣어 산화시켜 자국을 남겼다"고 설명했다.

실향민 윤정덕씨(81)는 선죽교에서 중학 시절인 1950년 3월1일 친구, 선배와 함께 찍은 사진을 꺼내 들어 일약 취재진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기도 했다.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면 땀을 흘린다는 선죽교 옆 표충비, 정몽주를 기리는 숭양서원도 필수 방문코스.


▲ 황진이가 되살아난 듯
점심 식사 후 찾은 곳은 개성 관광의 메인코스인 송악산 박연폭포. 개성시내에서 평양행 고속도로 등을 번갈아 타고 45분을 달리면 나타난다.

금강산의 구룡폭포, 설악산의 대승폭포와 함께 한국 3대 명폭으로 손꼽히며 서화담, 황진이와 더불어 송도삼절로 불리는 북한 천연기념물 제388호. 폭포 위에는 박연이란 연못이 있고 아래에는 직경 40m의 고모담이란 바위연못이 있다. 물은 박연에서 아래쪽 고모담을 향해 37m 절벽 아래로 떨어진다. 장대한 물줄기가 일으키는 물보라에 온몸이 젖을 정도다. 폭포 한켠 범사정은 폭포 구경에 제일 좋은 포인트. 고모담 왼편 기슭에는 물에 잠겨 윗부분만 보이는 용바위가 있는데 황진이가 남긴 '비류직하 삼천척 의시은하 락구천'의 초서체 글귀가 새겨져 있다.

▶개성의 음식 = 점심 식사로는 개성의 명물이라는 11첩 반상의 한정식(사진). 화려하진 않지만 마치 명절 상차림을 연상케 하는 메뉴가 대체로 담백한 맛을 낸다. 식사는 개성 시내 자남산려관과 민속려관, 통일관, 영통식당 등 4곳에서 이뤄졌다. 자남산려관 2층에 마련된 식당에 들어서자 식탁 위에는 개성 음식들이 한가득 차려져 있었다. 찹쌀을 반죽해 우묵우묵하게 칼집을 내 튀겼다 해서 '우메기', 개성 약밥, 돼지고기 편육볶음, 잡채, 두부육전, 계란볶음, 닭고기장, 녹두지짐, 삼색나물과 오이김치, 깻잎김치, 떡합선 등 한결같이 고향의 손맛을 느끼게 하는 것들이다. 일부 실향민들은 "진짜 개성맛"이라며 즐거워 했다. 식탁에는 봉학맥주(5도), 소주에 해당하는 령통술(25도), 백두산 들쭉술(40도)과 신덕샘물 등이 함께 놓여 있었다. 우리의 술맛과는 조금씩 다르지만 실향민들에게는 고향방문길 흥을 돋우는 더없는 것들이다. 관광지 곳곳의 판매대에는 콜라와 비슷한 '코코아 탄산단물'도 팔았다. 살짝 코코아 향이 나고 톡 쏘는 맛이 덜하지만 페트병 디자인이나 색깔이 영락없는 콜라다.


▶여행 팁 = 개성관광에는 몇 가지 주의사항이 있다. 그중 사진 촬영에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 카메라 렌즈는 150㎚이하로 제한되며, 일단 남측 출입사무소를 넘어서면 차창 밖의 사진 촬영을 할 수 없다. 개성 거리의 표정도 담을 수 없다. 촬영은 지정된 관광지에서만 가능하다. 돈은 미국달러만 통용 된다. 시범 관광비용은 1인 19만5000원. 당일 관광치고는 비싸다는 여론 때문에 현대아산 측은 본 관광에서는 이를 조정할 예정이다.

<스포츠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