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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성삼재에서 벽소령까지

마니쏘리 2010. 6. 26. 14:04

걷다보면 삶까지 뜨거워지는 지리산 능선

 

<지리산 종주기1> 성삼재에서 벽소령까지
    안병기(smreoquf2) 기자   
▲ 노고단에서 돼지령으로 가는 길목에서 마주친 붉은 해
ⓒ2005 안병기
10월 25일 새벽, 구례 버스 터미날에서 4시 20분에 출발한 버스는 채 30분도 걸리지 않아 성삼재에 도착했다. 하현달이 30만 km 저편에서부터 성삼재까지 빛을 날라다 주는 수고를 아끼지 않고 있었다. 저벅 저벅 산길을 올라간다.

산을 오를수록 달빛이 점점 더 환해졌다. 환하다 못해 희디 흰 달빛이었다. 큰 달무리가 달을 감싸고 있었다. 이런 달밤을 걷는 것은 어린 시절 이래로 처음이었다.

아침 6시. 노고단 고개에 닿았다. 노고단은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의 어머니인 선도성모를 지리산 산신으로 받들고 제사를 지내던 곳이라 한다. 선도성모의 높임말인 노고와 제사를 지내던 제단이 합쳐져서 노고단이 된 것이다. 노고단 할미께서는 아직 깨어나시지 않은 모양이다.

노고단 자락에 30여 분 가량 머무르며 날이 좀더 밝기를 기다렸다. 산죽 사이로 난 길을 걸어간다. 돼지령 쯤에서 떠오른 지 얼마 되지 않은 붉은 해를 만났다. 돼지령은 멧돼지가 자주 출몰한다 해서 붙은 이름이라 한다. 꽤 너른 공터가 있어 돼지평전이라고도 부른다.

▲ 노루목 근처. 단풍 빛깔이 저녁놀보다 더 곱게 물들었다. 왼쪽 멀리 바라다 보이는 봉우리가 노고단(1507m)이다.
ⓒ2005 안병기
2시간여를 걸은 끝에 노루목에 도착했다. 노루목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데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다. 바위 모양이 노루가 머리를 치켜든 모습을 닮았다 해서 붙은 이름이라거나, 노루가 지나다니던 길목이라서 노루목이라 불렀다거나 하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런가 하며 산에서 갈림길은 모두 다 노루목이라 부른다는 말도 있다.

어둠이 완전히 가시자 지리산의 장엄한 면목이 한눈에 들어왔다. 산 옆에 산이 켜켜이 쌓여있는 풍경,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외경스러움에 전율한다. 지리산은 그야말로 신령한 산이다. 지리산(智異山)은 아무리 우매한 인간도 지리산에 들어오면 현자가 된다는 뜻이 들어 있기도 하다.

▲ 삼도봉(1499m) 오른쪽으로 비껴 선 이름모를 산줄기들. 골짜기 사이로 얕은 흰 구름이 깔려 있어 바라보는 이의 마음을 한없이 느긋하게 한다.
ⓒ2005 안병기
30여 분을 더 걸어서 전라남북도와 경상남도의 경계를 이룬다는 삼도봉에 도착했다. 삼도봉에는 쇠로 된 삼각형의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원래 이 봉우리는 정상 부분의 바위가 마치 낫의 날과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다 하여 '낫날봉'이라 불렀다고 한다. 낫날이라는 발음이 어려웠던 탓일까. 등산객들 사이에선 '날라리봉' 또는 '늴리리봉' 등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도착한 사람들마다 기념 삼아 사진을 찍느라 법석이다. 한 번 밟으면 삼도를 한꺼번에 밟는 셈이니 자신이 마치 축지법이라도 쓰는 기분이 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들 마음 속에도 삼도봉 같은 곳이 있어 출신지역을 가리지 않고 스스럼없이 어울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 삼도봉에서 화개재로 내려가는 길에 바라본 토끼봉(1534m). 이름과는 달리 수많은 계단을 밟고 올라가야만 하는 힘든 봉우리로서 지리산 종주 코스 중 난코스의 하나로 꼽힌다.
ⓒ2005 안병기
토끼봉을 향해 간다. 날라다니다시피 걸어왔다던 지금까지의 길과는 사뭇 다른 길이다. 어찌나 계단이 많고, 가파른지 숨이 턱턱 막혀온다.

토끼봉이란 명칭은 이곳에 토끼가 많다거나 봉우리가 토끼 모양이라고 해서 생긴 것이 아니다. 반야봉을 기점으로 24방위의 정동(正東)에 해당하는 묘방향(卯方向)이라 해서 토끼봉(卯峯)이라 부른다고 한다.

정상에는 구상나무 숲이 있고, 털진달래 숲 사이로 길이 나 있다. 서쪽으로는 반야봉의 웅장한 모습이 바라다 보이고, 북쪽으로는 뱀사골이, 동남쪽으로는 화개골이 보인다.

▲ 명선봉(1586.3m). 이 봉우리를 내려서면 연하천 산장이 기다리고 있다.
ⓒ2005 안병기
화개재에서 토끼봉을 오를 때와는 달리 토끼봉에서 명선봉으로 오르는 길은 밋밋한 길이다. 산길을 터덜터덜 내려가자 연하천 산장이 나온다. 연하천(煙霞泉)이란 이름이 참 곱다. 연기연, 노을하 자에 샘천 자다. 뭔가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이름이다.

이곳은 내가 오늘 묵어갈 예정인 벽소령 산장보다는 물이 훨씬 풍부한 곳이다. 샘에서 물을 한 바가지 받아 마시고 나서 배낭에서 꺼낸 물통에다 물을 가득 채운다. 좀 배낭이 무겁긴 할 테지만, 할 수 없는 일이다. 혹 물이라도 나오지 않는 날이면 어쩔 것인가.

▲ 연하천 산장과 형제봉 사이에 있는 이름 없는 봉우리에서 바라본 산들. 구름위에 가려져 봉우리만 둥실 떠 있는 풍경이 마치 신선의 경지를 연상케 한다.
ⓒ2005 안병기
연하천을 지나서 다시 고개를 올라간다. 지도를 놓고 살펴보지만 이름이 나와 있지 않는 봉우리다.

저 멀리 구름에 가려져 봉우리만 둥실 떠 있는 산이 보인다. 무릇 선경이란 저런 것이 아닐까. 저 봉우리에 다가가면 신선이 부는 젓대소리 한 자락이라도 들을 수 있을 것만 같다.

▲ 형제봉으로 오르는 길목을 수놓고 있는 단풍잎들. 오래 들여다보노라면 서러울만큼 곱다.
ⓒ2005 안병기
어쩌면 지리산 단풍들도 나처럼 지리산 종주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단풍들은 이미 7부 능선 자락에 내려가 있다. 산봉우리의 단풍은 이미 절정을 지나버린 듯하다.

그래도 가끔씩 아직은 붉은 빛을 잃지 않고 있는 나뭇잎들이 남아 있다. 느리게 산다는 것, 음미한다는 말 뜻을 아는 나뭇잎들인 모양이다.

▲ 형제봉(1442m) 가는 길목에 서 있는 형제 바위가 보여주는 선경(仙景)
ⓒ2005 안병기

▲ 형제봉에서 벽소령 가는 길에 있는 고사목. 멀리 바라다 보이는 봉우리가 천황봉이다.
ⓒ2005 안병기
형제봉 가는 길에서 기암괴석을 만났다. 바위 꼭대기에 올라앉은 소나무 한 그루가 그윽한 눈빛으로 아래를 내려다본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나무나 높이 올라간 것들은 위태롭다. 위태로운 것은 높이가 아니라 자만심이다.

형제봉을 지나자 너덜지대가 이어진다. 차츰 발바닥이 아파오기 시작한다. 벌써 이렇게 발바닥이 아프고 관절이 쑤셔서야 어찌할 것인가. 벌써부터 내일 일이 걱정돼 온다.

너덜지대를 간신히 통과해서 벽소령 산장에 도착했다. 오늘 하루는 이곳에서 묵었다 갈 것이다. 먼저 온 사람들에게 들으니 산장은 5시나 돼야 문을 연다고 한다.

형제봉 건너편 산자락에서 일부러 시간을 지체하며 왔건만, 시간이 아직 4시도 되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천천히 올 것 그랬나 보다.

▲ 종주하는 동안 하룻밤 신세를 졌던 벽소령 산장
ⓒ2005 안병기
쓰러질 줄 아는 영혼만이 별이 된다

오후 5시 예약을 확인하고 나서 자리를 배정 받았다. 밤 8시가 되자 취침을 위해 불이 꺼졌다. 할 수 없이 자리에 누워 눈을 감았다. 너무 피곤한 나머지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어느 새 풋잠이 들었던 것일까. 손전등 불빛에 시계를 비춰보니 새벽 2시였다. 산장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별들이 제 존재를 영롱하게 밝히고 있다. 오늘밤 내게 안기는 별빛들은 몇 억 광년 저편에서 날아온 것일까. 나는 산장 앞 나무 의자에 앉아 몇 억 광년 전의 세상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별빛 끝에서는 몇 억년의 세월들이 잘게 잘게 부서지고 있었다.

이 넓은 고개에서는 저절로 퍼질러 앉아
막걸리 한 사발 부침개 한 장 사먹고
남족 아래 골짜기 내려다본다
그 사람 내음이 뭉클 올라온다
가슴 뜨거운 젊음을 이끌었던
그 사람의 내음
쫓기며 부대끼며 외로웠던 사람이
이 등성이를 넘나들어 빗점골
죽음과 맞닥뜨려 쓰러져서
그가 입맞추던 그 풀내음이 올라온다
덕평봉 형제봉 세석고원
벽소령 고개까지
온통 그 사람의 내음 철쭉으로 벙글어
견디고 이울다가
내 이토록 숨막힌 사랑 땅에 떨어짐이여
사람은 누구나 다 사라지지만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나씩 떨어어지지만
무엇을 그리워하여 쓰러지는 일 아름답구나!
그 사람 가던 길 내음 맡으며
나 또한 가는 길 힘이 붙는다

이성부 시 '벽소령 내음' 전문


무엇을 그리워하여 쓰러지는 일은 아름답다. 쓰러질 때까지 그리워하는 일은 아름답다. 그렇게 쓰러질 줄 아는 영혼만이 별이 되고, 영원이 되는 것이다.

나 역시 오늘은 지쳐 쓰러질지라도 천황봉까지는 가야만 한다. 거기에 가면 생이 달라지느냐고? 1915m, 그깟 봉우리에 무슨 별이 있으며, 영원이 있겠느냐고? 기껏해야 해발 2~300미터밖에 안되는 도회지에 사는 사람에겐 그 높이마저도 별이 아니런가.

오늘도 가야할 길이 멀다. 빨리 아침밥을 지어 먹고 산행을 서둘러야겠다.
10월 여행 이벤트 응모
  2005-10-31 21:42
ⓒ 2005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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