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아름다운 그림,명화

단원 김홍도의 금수,영모,사군자.

마니쏘리 2010. 6. 24. 21:55

 

 

 



묵죽도(墨竹圖 23.0×27.4)

단원은 기본적으로 화원(畵員)이었기 때문에 다양한 화종을 그림은 무론이요 다양한 형식의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좋은 부채 그림이 없고, 좋은 그림은 고사하고 거의 그런 것을 보기조차 어려운 실정이다. 특히 대나무 그림은 국초(國初)의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도화서(圖畵署) 화원(畵員)의 시재(詩才)에서 사장 중요한 화제(畵題)로 규정된 이래 영, 정조대(英, 正祖代)의 <속대전(續大典)>과 <대전통편(大典通編)>에서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그리고 단원의 스승인 표암(豹庵) 강세황(姜世晃)은 스스로 묵죽(墨竹)을 가장 특장(特長)으로 여기며 뛰어난 묵죽을 많이 남겼고, 단원과도 친분이 있었던 표암의 수제자 자하(紫霞) 신위(申緯)도 묵죽의 명품을 많이 남겨 단시 대나무 그림에 대한 호상(好尙)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기록에는 단원의 대나무 그림에 대해 언급한 것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원의 대나무 그림은 여간해서 볼 수 없으니 의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그림은 그런 의문을 다소 풀어주면서 단원이 만년에 그린 대나무의 한 모습을 보여주는 매우 귀한 작품이다. 대나무 그림에서도 단원은 역시 단원이다. 대상에 집착하지 않고 수쳐 지나가는 바람처럼 가볍게 특징만을 잡아채서 익을 대로 익은 필묵을 신속하고 경퇘하게 감각적인 필치로 마구 쳐대는 단원 만년의 특징이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여기서 대나무는 군자(君子)의 상징으로서의 고결한 대나무가 아니다. 그저 필묵이 춤출 수 없는 하나의 소재 또는 형식, 가락, 무대와 같은 것일 뿐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의 악곡(樂曲)을 단원식으로 연주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단원은 그 속에 화원으로서 익힌 필묵의 연주 기교를 과시하고 있다. 줄기의 필치는 아래에서 위로 올려 친 것이 분명하나 통상의 경우와 반대로 농담(濃淡)은 위로 가면서 진해졌다. 먹을 찍은 다움 붓끝에 살짝 물을 찍음으로써 그려가면서 더 진해지는 기교를 부린 것이다. 대부분의 대나무를 왼쪽으로 친 것도 기교의 과시이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가 난초의 화법을 이야기하면서 언급하였듯이 왼쪽으로 치는 것은 오른쪽으로 치는 것보다 몇 배 더 어려운 기술이다. 조선시대 대나무의 거의 대부분은 오른쪽으로 쳤다. 그러나 단원은 거의 대부분을 왼쪽으로 순식간에 쳐내려 놀라운 기교를 과시하고 있다. 얼마나 단숨에 쳤는지 줄기에 겹쳐긴 ‘분’자법(‘分’字法) 잎사귀를 치면서는 심지어 미처 호흡도 조절되지 않아 붓이 꼬이고 뒤섞인 흔적이 나타나 있다. 그러나 이런 그림은 표암이나 자하 같은 시정(詩情)과 격조를 담을 수 없는 한계가 있다. 화원 제일의 시서화(詩書畵) 삼절(三絶)인 단원이였지만 단원은 또 단원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왼쪽에 만년의 ‘김홍도’도장만 찍었다.
이 그림은 현재 동일한 크기의 동일한 화첩에 있었다고 생각되는 <월하고문(月下敲門)><수류화게(水流花開)><노송쾌운(老松掛雲)><녹선채지(鹿仙採芝)>의 일품(逸品)과 오폭합장(五幅合藏)> 되어있다.


 





해도(蟹圖 30.9×41.2)
그림의 크기나 중앙의 접힌 자국에 의해 화첩에서 산락된 것으로 여겨진다. 1916년 테라우치(寺內正毅)에 의해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된 그림 중에 포함되어 있다. 물풀을 배경으로 한 쌍의 게만의 나타낸 것으로 ‘爲柳老?行饌需寫贈“묵서가 있다. 수묵(水墨)만으로 그린 게 그림은 김홍도에 앞서 심사정(沈師正, 1707~17690)이나 최북(崔北, 1712~1786경)의 소품들도 알려져 있다. 이들은 갈대와 게를 함께 나타낸 것들이 일반적이다.
김홍도의 게 그림들은 간송미술관이나 국립박물관 외에도 개인 소장품들이 더러 있어 단원이 이 소재의 그림도 적지 않게 그렸음을 짐작케 한다. 이들 중에는 갈대가 아닌 일반 물풀에다가 송사리 등 작은 물고기들을 함께 그린 것들도 있는데 중국 명(明)의 서위(徐渭, 1521~1593)를 방해서 그렸다고 밝힌 것, 오세창(吳世昌, 1864~1953)의 배관기가 있는 것 등도 있다.






해탐노화도(蟹貪蘆花圖 23.1×27.5)
현존되는 조선시대 게그림은 대체로 18세기 이후 것들이 주류를 이룬다. 조선 말기에서 근대화단에 이르기까지 줄기차게 그려졌으니, 지방화단에서 활동이 두드러진 지창한(池昌翰, 1851~1921)이 이 소재로 명성을 얻었다. 어해도(魚蟹圖)의 한 요소로 그려지기도 했고 이들과 별개로 게만을 그리기도 했는데, 김홍도 또한 게 그림을 즐겨 그린듯 알려진 그림이 여러 점에 이른다.이 그림처럼 두 마리 게가 갈대꽃을 물고 있으면 ‘두 차례 과거에 급제하여 임금이 내려주신 음식을 받는다’는 의미로 ‘이갑전려(二甲傳?)’로 과거 급제를 기원하는 그림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먹만이 아닌 설채기법이 두드러진 이 그림은 화면 좌상단에 “바다용왕의 처소에서도 옆으로 가네(海能王處也橫行)”의 제발이 있어 그림에 아취를 더한다. 이 그림은 <쌍작보희도(雙鵲報喜圖)> <월하취생도(月下吹笙圖)> 등과 같은 화첩에서 산락된 것임을 그림의 크기와 같은 두 도장에 의해서 확인된다.





 



작도(鵲圖 27.2×20.2)
마른 모과나무 가지 위에 앉아있는 한 마리 까치를 자연스럽게 그렸다. 좌측에 ‘단로(壇老)’라는 낙관(落款)이 없어도 필치가 안정되고 묵조(墨調)에 깊이가 있음을 보아 만년기(晩年期)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이런 깊이가 있는 묵법(墨法)은 간송미술관 소장 <습득도(拾得圖)>에서도 볼 수 있는데 김홍도의 소품(小品)중에서도 뛰어난 것들이다. 우 하단에는 간재(艮齎) 홍의영(洪儀泳 ;1750~1815)의 제(題)가 있다. “마른 모과나무 가지 위에 단정히 앉아 깍깍 울어대니 이는 누구에게 기쁜 소식을 전함인가?”




유압도(遊鴨圖 26.5×20.2)
교차된 낮은 언덕 사이로 난 작은 개울을 따라 헤엄치는 두 쌍의 오리를 위에서 내려다 본 모습으로 그렸다. 언덕 사이에 여백처리로 자연스럽게 대기감(大氣感)을 내고 몰골법(沒骨法)으로 생동하는 오리의 모습을 표현했다. 힘들이지 않은 필치, 노련한 공간감각, 세련된 담채(淡彩), 특유의 관몸(灌木)표현 등이 김홍도의 50대 원숙기의 작품으로 보게 한다. 좌하단에는 구룡산인(九龍山人) 김용진(金容鎭 ;1882~1968)의 소장인(所藏印)‘영운진장(潁雲珍藏)’이 찍혀 있다. <근영화휘(槿域畵彙)> 지첩(地帖)에 수록되어 있다.




고목비금도(古木飛禽圖 48.8×38.3)
나르는 한 쌍의 새, 붉게 단풍 든 성근 잎을 지닌 고목, 바위 처리 등 세부를 살필 때나 2행의 제발(身托廣寒應得術)등에선 김홍도 특유의 필치를 확연히 읽게된다. 그러나 전체를 살피면 등장 소재의 비례관계와 산만한 구성 탓인지 다소 어색한 느낌마저 든다. 그림의 크기로 미루어 화첩에 속했던 편화보다는 병풍에 속했던 것이거나 족자에 가까운데 보다 큰 그림에서 아랫부분이 잘린 것으로 생각되기도 하다.



연지유압도(蓮池柳鴨圖 23.8×16.0)
비록 소품이나 정확한 묘사력에 의해 소재가 선명하며, 화면 구성의 묘(妙), 고운 선채기법 등에 의해 시선을 모으게 하는 그림이다. 화면 오른쪽 상부에 버드나무를, 하좌단에 많은 비중으로 연잎 그늘에 한 쌍의 오리를, 그리고 이 두 소재 사이로 하천을 지그재그로 나타내 거리감과 깊이를 더한다. 좌상단에 사능(士能)이란 관서에 의해 단원의 생애 중 전반인 30대에 그렸음을 알 수 있는데 이를 증좌하듯 필법이 정제되어 있고 세부처리가 꼼꼼함을 엿볼 수 있다.
50대의 활달함과는 거리가 있으나, 버드나무 잎과 줄기묘사 및 연잎, 그리고 지면의 묘사 등에서도 농담의 구별 및 선염(渲染)의 뛰어남을 감지케 된다. 영모화의 소재 중 이른 비교적 시기의 것이되 이 소재에 있어서도 결코 타 분야에 뒤지지 않는 김홍도의 역량을 보여주는 그림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