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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 해미읍성
마니쏘리
2010. 6. 24. 11:04
서산 해미읍성
그 곳의 하늘은 유난히 파랗다.
조선조의 대표적인 읍성인 해미읍성. |
……하지만 아는가. 유난한 아름다움의 이면에는 언제나 아픔과 슬픔이 빼곡하게 깃들어 있음을.
세월의 두툼한 나이테를 두른 충남 서산의 해미읍성. 이 아름다운 고성(古城)에 깃든 자욱한 슬픔은 오늘도 그렇게 유난히 짙푸른 하늘빛으로 서성이고 있다.
서해안고속도로가 개통된 후 아주 쉽게 찾아갈 수 있게 된 해미읍성은 마을 한가운데에 드넓게 자리잡고 있다. 오랜 세월에도 제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읍성은 금방이라도 시간을 수백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할 만큼 고색창연하다.
흔히 보는 산성과 달리 읍성이란 읍을 둘러싸고 세운 평지성으로, 해미읍성 외에 고창읍성, 낙안읍성 등이 유명하다. 해미읍성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읍성으로 손꼽힌다. 조선 성종 22년(1491)에 완성한 석성으로 둘레 약 1.8km, 높이 5m, 총 면적 6만여평의 거대한 성이었다. 성이 세워졌을 무렵에는 동·서·남쪽에 세 개의 문이 있었고, 성 안에는 관아 등 많은 건물이 있었다.
해미 순교성지. |
그러나 성 안에는 아직도 철거되지 않은, 아니 영원히 철거될 수 없는 수난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조선말 천주교 탄압이 이뤄지던 때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이 곳에서 순교했다. 당시 관아가 있던 이 곳으로 충청도 각 지역에서 잡혀 온 수많은 신자들이 고문을 받고 죽음을 당했으며, 특히 1866년 병인박해 때는 1,000여 명이 처형됐다. 성 안 광장에는 대원군 집정 당시 체포된 천주교도들이 갇혀 있던 감옥터와, 신자들을 나뭇가지에 매달아 모진 고문을 했던 노거수 회화나무가 지금도 서 있다. 바로 성문 밖 도로변에는 회화나무에 매달려 고문을 받으면서도 굴하지 않은 신도들을 돌 위에 태질해 살해했던 자리개돌이 남아 있어 가슴을 아프게 한다.
당시 많은 신도를 일일이 처형하는 게 힘들자 읍성 밖 해미천변에 큰 구덩이를 파고 생매장하기까지 했다. 이 때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마음이 변할 것을 걱정한 많은 교인들이 남보다 먼저 스스로 구덩이 속으로 뛰어들었다고 한다. 1935년 베드로 신부가 유해 발굴작업을 시작했는데 수습된 뼈들이 몇 가마니에 이르렀다. 이 유골은 줄곧 음암면 상홍리에 안치돼 있었으나 l975년 이규남 신부가 해미천변에 순교 기념탑을 세우면서 그리로 옮겼다. 지금 그 곳은 해미순교성지가 조성돼 천주교 신자들의 순례지가 되고 있다. 천주교 신도가 아닌 일반인들도 지난날의 끔찍했던 천주교 수난사의 현장을 돌아보는 발걸음을 오늘도 재촉하고 있다.
*가는 요령
해미읍성 안에 있는 호야나무. 순교자들을 고문하는 도구로 썼다. |
*별미
꽃게장을 좋아하는 이라면 서산시청 근처 축협 앞에 자리한 삼기식당(041-665-5392)의 꽃게장백반과 꽃게탕을 놓치지 말길. 꽃게 집산지인 안흥항과 가까운 서산은 싱싱한 꽃게 요리를 맛볼 수 있는 곳이다. 그 중 삼기식당은 굴젖 절인 국물을 1년간 삭혀 마늘, 생강 등 갖은 양념을 해서 꽃게장을 담근다. 시원하고 구수한 맛과 상큼하면서도 감칠맛 나는 꽃게장이 별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