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품있는 가옥 ''한상훈'' 가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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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벌교 금화산 자락의 작은 마을로 들어서면, 기품 있는 한옥 ‘한상훈 家’가 모습을 드러낸다. 잡지 『뿌리 깊은 나무』의 발행인 고 한창기 선생의 동생이자, 전통 문화 보존을 위해 힘썼던 고 한상훈 선생의 가옥에는 “돈을 낙엽처럼 태우더라도 전통 문화를 알리겠다”던 남도 선비의 정신이 서려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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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자 가옥의 끝 부분에 위치한 부엌 자리에는 다실을 만들었다. 처녀 시절 교편을 잡았던 차정금 여사는 잡지 『샘이 깊은 물』에서 차 강좌를 진행했던 경험을 살려, 징광차 사업을 이끌어가고 있다.
건축가 황두진의 글에서 ‘천리를 달려온 집’ 이야기를 발견한 기자는 마음이 분주했다. 서울 한남동에서 전라남도 벌교까지, 천리 길을 마다 않고 한옥을 옮겨온 이가 『뿌리 깊은 나무』의 발행인 한창기 선생의 동생이라 하니, 그 ‘사연 있는’ 집이 더욱 궁금해질 수밖에. 안타깝게도 한옥을 옮겨온 주인은 이미 작고하였고, 지금은 그의 부인 차정금 여사가 호젓한 산속 집을 지키고 있다. ‘묵은 먼지까지 제 것으로 켜켜이 담아 안으며, 남편에 대한 의리’를 지킨다는 여사와의 만남은 그래서 더욱 반가웠다.
천리를 옮겨간 한옥의 사연 예부터 남도는 뛰어난 문인이 많기로 유명하다. 고 한창기 선생은 남도 출신 언론인으로 한글 전용 및 가로쓰기를 주장했고,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알리는 것에도 앞장섰다. 그의 동생 한상훈 선생 또한 뜻을 같이해 전통 문화 발전을 위해 헌신하였는데, 판소리를 복원하기 위하여 박동진 선생을 지원했고, 전통 옹기와 차 복원 사업에도 뛰어들었다. 그리고 30대 중반 무렵인 1979년, 벌교 출신이었던 선생은 남도의 정취와 문화를 간직한 징광 지역에 전통문화단지를 세우기로 결심했다. 금화산에서 옛날 방식으로 차나무를 기르고 옹기를 굽는 것이 잊혀가는 우리의 문화 복원에 기여한다고 믿었기 때문. 그 무렵, 한남대로가 확장되면서 단정한 한옥 한 채가 철거될 위기라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직접 보니 세 칸짜리 ㄱ자 안채와 두 칸짜리 사랑채가 전부인 소박한 규모였지만, 선생은 “청빈한 양반가의 예사롭지 않은 기품을 느꼈다” 한다. 그 결과, ‘정 대목’이라 불리는 나관 목수를 만나 한옥의 ‘공간 이동’이라는 초유의 작업을 시작했다. “한옥은 못이나 접착제를 전혀 쓰지 않고 오로지 나무와 나무를 조립하는 방식으로 지어집니다. 그러니 기왓장을 1번부터 몇백 번까지, 마룻장 또한 1번부터 몇십 번까지 모두 번호를 매기고 해체했어요. 대들보부터 주춧돌까지 어느 것 하나 버리지 않고 모두 징광리로 옮겨온 뒤, 번호에 맞춰 원형과 똑같이 조립했고요.” 한상훈 선생은 한옥의 미덕을 잘 아는 만큼, 그 원형을 지켜야 한다는 고집 또한 대단했다. 그 시절 옆에서 지켜보던 부인이 걱정할 정도로 한옥에 빠져 살았다 하니 우리 것에 대한 선생의 사랑을 새삼 느낄 수 있다.
1 사랑채를 돌아 뒷마당으로 들어서면 반층 정도 높은 위치에 안채가 나타난다. 건물뿐 아니라 대문, 맷돌, 조경용 석상까지 옮겨온 한상훈 선생의 깐깐한 성품을 느낄 수 있다. 2 집 중앙에 위치한 거실 풍경. 오래전 시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자개장과 서양식 의자를 멋스럽게 믹스했다. 집 내부는 얇은 펄프 한지 대신 닥나무 사이에 천을 끼운 전통 종이를 이용하여 도배했다. 비용과 정성은 많이 들어갔지만, 문을 두드리면 청명한 북소리가 나고 색깔 또한 정갈하다.
전통과 현대의 멋스러운 조화 징광리에 자리 잡은 한상훈 가옥의 대문을 열면, 두 칸짜리 소박한 사랑채가 먼저 모습을 드러낸다. 한데 당황스럽게도 처마가 높아 당당한 기품이 느껴진다던 안채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산자락의 모습을 그대로 살렸지요. 계곡 근처 평평한 땅에 안채를 옮겨왔고, 그보다 반 계단쯤 낮은 땅에 사랑채를 두었어요.” 안채 마당과 사랑채 사이에는 돌담을 쌓아, 안채는 높은 곳에 있지만 밖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사랑채는 대문에 인접하지만 돌담과 나무로 둘러싸여 아늑하다. 정갈하고 소박한 구조의 가옥은 2001년 현대식으로 레노베이션됐다. 1996년부터 비가 새기 시작했지만 고칠 여력이 없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상태가 악화됐기 때문이다. 그냥 두면 무너진다는 사형 선고까지 있자, ‘남편과의 의리로 한옥을 지키겠다’ 다짐했던 차정금 여사는 참 난감해졌다. 개조를 잘못하면 자칫 집의 품격이 떨어질 수 있어 섣불리 결정을 내릴 수 없었던 것. 다행히 수소문 끝에 ‘전통 한옥을 멋스럽게 고친다’고 알려진 한국가구박물관의 정미숙 관장을 찾아냈다. ‘젊은 사람들도 살고 싶어하는 세련된 한옥’을 만들어야 한옥이 발전한다고 믿는 정 관장은 여사의 고민을 단숨에 해결해주었다. 관장은 외관에는 전혀 손을 대지 않고, 대들보와 천장만을 튼튼하게 다듬자고 제안했다. 대신 집 안에는 현대식 화장실과 부엌을 들여놓아, 편안하게 살림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물론 공사에 들어가는 모든 재료와 건축 방식은 전통 한옥을 지을 때와 동일했다. 그 이후 살림은 훨씬 편해졌고, 한옥 생활의 호젓함은 유지된다. 원래의 골격도 훌륭하지만 고친 사람의 치열한 고민, 사는 사람의 정성스러운 손길이 더해졌기 때문에, 이 집은 올해 초 문화재청에서 뽑은 ‘레노베이션 잘 된 전통 한옥’으로 선정될 수 있었다.
3 현대식으로 레노베이션된 부엌에는 서양식 식탁과 수납장을 짜 넣었다. 여사는 ‘외관은 유지하되, 생활에 편리한 주거 공간’으로 만들어야 한옥이 발전한다고 믿는다. 4 징광옹기에서 생산하는 제품은 인사동 매장(02·722-3409)에서도 만날 수 있다. 흙과 유약은 전통 방식을 고수하되, 가마의 온도를 높여 제작하기 때문에, 잘 깨지는 옹기의 단점이 보완되었다. 대학원을 졸업한 딸이 디자이너로 가세하면서, 한층 세련된 생활 옹기를 선보이는 중.
자연에 살어리랏다 30대 중반의 한창 젊은 나이에 시골에서 차 농사나 짓겠다는 남편의 뜻이 서운하지 않았을까. “남편은 문화적인 측면에서의 스승이었어요. 항상 맥이 끊긴 문화를 되살리기 위해서 노력했고, 공부도 많이 했지요. 시골 생활이 고생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옳은 일이었기 때문에, 감히 반대할 생각도 안 했어요.” 남편을 존경한다고 표현하는 초로의 여사는 현재도 남편의 뜻에 따라 징광문화단지를 운영하고 있다. 옛날식 덖음 차를 생산하기 위해 금화산 자락에 차나무를 심었고, 농약과 비료는 일절 사용하지 않는다. 순수자연농법으로 수확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의 손으로 작업하기 때문에 징광차는 그 가치를 아는 소수의 사람들 사이에서 ‘명품 차’로 유명하다. “1996년 4월 산 전체에 불이 나는 사고가 있었지요. 산속에 심은 차나무가 전부 불에 타버렸기 때문에,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했어요. 그런데 장마 뒤 땅속 깊은 곳에서 차나무 뿌리가 싹을 틔우더군요.” 비료를 주며 관제농으로 개간했다면, 얕은 곳에 뿌리가 있어 지금의 명맥을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을 계기로 여사는 관제농과 비교할 수 없는 야생 차의 생명력을 확인했고, 계시처럼 본인 또한 “평생을 징광차와 문화 사업에 몸담을 것”이라 다짐했다. 얼마 전 국내 차에서 농약 성분이 검출되어 논란이 되었는데, 손 많이 가고 몸은 고되지만 좋은 전통 차를 생산한다는 자부심으로 마음만은 뿌듯하다 한다.
5 안채 마루와 처마가 높아 웅장하다. 6 사랑채 옆 사랑 마루. 정자처럼 풍류를 즐길 수 있다.
징광문화사업 지키는 아들과 딸 1998년 한상훈 선생이 돌아가시고 나서 얼마간 적적한 생활을 했던 여사의 곁으로 최근 아들과 딸이 모두 돌아왔다. 도자기를 전공한 딸은 옹기 디자이너로 활동하고, 문화재학과를 졸업한 아들은 여사 옆에서 농삿일과 징광문화사업을 돕기로 결심했기 때문. 직접 생산한 천연 유약만을 사용하는 징광옹기는 질적인 면에서 이미 인정을 받았는데, 디자이너인 딸이 가세하면서 젊은 감각의 디자인으로 재탄생되었다. 아파트 문화, 김치냉장고 등 가전제품의 발전에 따라 옹기도 현대식으로 진화해야 한다고 믿던 차에 딸까지 가세하자 최근에는 모던한 감각의 옹기 밥그릇과 국그릇 등 식기를 소개하고 있다. 내추럴한 질감과 모던한 디자인을 조화시키려는 노력이 있어, 징광옹기는 지난해 유네스코에서 선정한 ‘아름다운 수공예품 동북아시아 부문’에서 석 점이 선정되는 수확을 거뒀다. 예순을 앞둔 여사는 “남편의 뜻처럼, 우리 문화를 체험하고 그 소중함을 배울 수 있는 곳으로 징광을 발전시키겠다”고 힘주어 말한다. 우리 문화를 지키기 위해 돈을 낙엽처럼 썼다던 한창기·한상훈 형제의 뜻은 그 부인을 통해, 그리고 후대를 통해 이렇게 올곧게 이어질 것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