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휴식~/건강,행복

인격장애를 극복하는 구체적 방법(1) 자기 가치에 대한 확신

마니쏘리 2010. 4. 5. 18:54

인격장애를 극복하는 구체적 방법(1) 자기 가치에 대한 확신

사람이 자기 인생을 비관하는 이유는 대개 자신의 가치를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청년들은 때때로 죽고 싶다는 말을 합니다.
그 말을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아직 자신의 값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애인이 생기고 사랑을 하다 보면 그런 소리가 거의 뜸해집니다.

그러다가 아이 하나 낳게 되면 그런 소리가 정상적인 경우에는 사라집니다.
오히려 "나는 아이를 내버려 두고 죽을 수 없어!" 합니다.
50억이 넘는 인류가 있지만 이 아이를 아가페의 사랑으로 키울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자기 밖에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 자기 가치를 깨닫게 되고 그는 도저히 죽을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가치를 아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은 대단히 가치 있는 사람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가 여러 가지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주인이 귀하기 때문입니다.

하찮은 물건이라도 주인이 귀하면 그 물건도 귀해지는 법입니다.
같은 만년필이라도 링컨이 사용했던 만년필은 귀한 보물입니다.
같은 편지라도 백범 김구 선생님의 편지는 귀한 보물이 됩니다.
그 물건 자체가 귀한 것이 아닙니다.
그 물건의 주인이 귀하기 때문에 그 물건도 귀하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존귀한 이유는 생김새가 아름답거나 지식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자기의 주인(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주인이 하나님이고 그 하나님이 귀하시기 때문에 따라서 귀한 것입니다.

무속인이 귀한 사람이 될 수 없는 이유는 그의 주인이 귀신이기 때문입니다.
마약중독자가 귀하게 여김 받지 못하는 이유는 그의 주인이 마약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도가 귀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성도의 주인이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누가 가장 귀한 존재일까요?
자식, 부모, 아내... 물론 다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가장 소중한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의 생명입니다.
자기 자신의 생명이 없다면 자기 주변의 세상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6장 26절에 보면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의 목숨을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나같은 사람은 일찍 죽어야 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신성한 자기 존재에 대한 자기 모독입니다.
어떤 분은 기도할 때 "이 벌레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기도합니다.
회개하는 마음으로 말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지나치면 안됩니다.
왜 우리가 벌레만도 못합니까?
이것은 겸손이 아닙니다. 겸손도 지나치면 실례가 됩니다.
그리고 겸손이 너무 지나치면 오히려 자기 의를 내세우는 것이 됩니다.

자신의 가치를 억지로 무시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람이 살면서 참 행복을 느낄 때는 언제입니까?
그것은 자기의 존재 가치를 발견했을 때입니다.
자기 자신을 스스로 가치 있게 여기고 대견스럽게 여길 때
기쁨이 나오고 용기가 나오게 되고 그 가운데 행복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탕자가 집에 돌아오면서 스스로 생각합니다.
자기가 자기를 보아도 죽일 놈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업하다 실패한 것도 아니고 창기와 함께 놀아나다가 재산을 탕진했고
게다가 거의 폐인이 되다시피한 모습을 자기가 보아도 한심합니다.
스스로도 용서가 되지 않지만 한편으로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일꾼 중의 하나로 취급해 달라고 하더라도 집으로 돌아가자."
그래서 집으로 돌아가지만 얼마나 비참한 모습입니까?

그러나 아버지가 어떻게 맞이합니까? 기쁨으로 그를 맞이하며 소리칩니다.
"소를 잡으라. 목욕을 시키고 가락지를 끼우라. 잔치를 베풀라."
탕자가 스스로를 보는 관점과 아버지가 그를 보는 관점이 극과 극입니다.
그처럼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천하보다 값있게 보십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게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왜 나에게 복을 주시지 않을까?"
그러나 그것 때문에 서운해 할 필요가 없어야 합니다.
십자가 속에 이미 우리의 값이 다 들어있고, 우리의 가치가 드러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실상 십자가의 구원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받을 것을 다 받은 셈입니다.

우리 각 개인들은 이렇게 중요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라고 한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 자신을 함부로 생각하고 함부로 굴리는 것은 잘못입니다.

요즘 안타까운 사실은 사람이 너무 쉽게 죽어버린다는 사실입니다.
누가 싫다고 죽고, 배반당했다고 죽고, 살기 어렵다고 죽고,
대학입시에 떨어졌다고 죽고, 공부하기 싫다고 죽어버립니다.

죄 중에서 가장 큰 죄 중의 하나는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죄입니다.
하나님이 너는 존귀한 사람이라고 하는데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죽어 버리니
그것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것이며 얼마나 큰 죄가 됩니까?

그러한 태도가 나오는 것은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이 없기 때문입니다.
너무 현실에 집착하다 보니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미래를 내다보게 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미래가 있는 사람은 결코 죽지 않고 죽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생활은 그 초점이 현재에 있지 않고 언제나 미래에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의 주안점은 현재에도 있지만 언제나 미래에 더 강하게 나타납니다.
그래서 오늘 실패가 있고 오늘 고난이 있어도
미래의 분깃이 있는 사람은 그것쯤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실패를 많이 해 본 분이 있다면 그 사람은 할 말이 많아서 좋습니다.
실패를 모르고 살아온 사람은 할 말이 없습니다. 생이 재미가 없습니다.
그리고 다른 실패한 사람에게 인생의 조언을 할 수 없습니다.
결국 다른 사람을 감동시킬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실패한 사람은 그 실패를 통해 다른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습니다.

어떤 젊은 과부가 목사에게 찾아와 자신의 어려움을 호소했습니다.
"목사님! 어떻게 하면 좋아요?"
목사가 민망해 할 말이 없없습니다. 결국 한 마디 했습니다.
"어떡하긴요. 기도하며 살아야죠."
그러니까 이 젊은 과부가 답답해하며 말했습니다. "목사님은 내 심정을 몰라요."

목사가 그 심정을 잘 알 리가 있겠습니까? 정말 막막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무슨 말로 이 여인을 위로할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교회에 다니는 과부생활을 오래 한 어떤 여집사를 불렀습니다.
"빨리 와 주세요. 이런 사정이 있는데 당신이 좀 와 주어야 하겠습니다."

그 나이든 과부 여집사가 와서 젊은 과부에게 말했습니다.
"인생은 살 만한 것입니다. 용기를 내세요."
이 나이든 과부의 말에 젊은 과부가 위로를 받고 돌아갔습니다.
과부의 심정을 과부 외에 누가 알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상에 여러 종류의 사람을 두셨습니다.

그처럼 실패한 사람은 말해 줄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도처에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파란만장한 경험이 있다면 할 말이 많아서 얼마나 좋습니까?
그래서 그 경험도 하나님이 그 사람 자신에게 주신 선한 분깃입니다.

여러분! 절대 기죽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가치를 인정하십시오.
하나님이 필요하시다는 데 왜 이리 할 말이 많고 이유가 많습니까?
우리는 오늘 이 순간에도 생명이 건재한 상태에서 살고 있습니다.
아마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필요로 하고 계시다는 또 하나의 증거일 것입니다.

특히 자기의 환경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도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완벽하게 조건을 다 갖추었다고 해서 그것이 능사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움직이시는 과정을 보게 되면 부족한 사람을 많이 쓰십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의 관점은 그 마음의 중심에 가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관점에 여러분들에게도 주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인격장애를 극복하는 구체적 방법(2) 자기 관리의 지혜

기독교인들 중에서 <자기 가치에 대한 믿음>의 길을 출발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그 길 선상에서 여러 가지 인생의 장벽을 부딪히다 보면
자기 가치에 대한 신뢰감을 잃고 마음의 평안을 놓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 관리의 지혜가 부족한 때문일 것입니다.

인간인지라 자기 관리를 완벽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자기 관리를 위한 우리의 노력을 멈추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자기 관리를 할 수 있을까요?
이 시간에는 신앙인들의 정신건강을 소중하게 지키기 위해
제가 목회를 하면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3가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째, 문제의 책임을 남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신의 모습이 어떠한지는 깨닫지 못하고
"저 사람은 좀 이렇게 변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할 때가 많습니다.

목회자들도 참으로 아쉽지만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교인들이 좀 이렇게 변화되었으면..."하고 교인들이 변화되기를 원합니다.
목회를 하면 어려움을 제공하는 교인이 있기 마련입니다.
어떻게 그를 변화시킬 수 있을까요? 이것은 목회자들의 평생 숙제입니다.

몇 년 전에 어떤 목회자가 이런 간증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너무 말썽을 부리는 교인이 있어서 너무 고통스러워 하루는 이런 결심을 했습니다.
"그를 변화시켜 새 사람을 만들리라. 아니면 추방하리라."

그래서 단단히 결심하고 작정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주여, 이 사람을 변화시켜 주시옵소서. 아니면 다른 곳으로 보내주시옵소서."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아름답게 들어주셨습니다.
기도하던 3일 째 되는 날 열심히 기도하는 중에 마음속에 감동이 온 것입니다.
그리고 감동 중에 하나님이 세미한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나도 그를 고칠 능력이 없어서 죽었다. 고칠 능력은 없었지만 죽을 능력은 있단다.
그 사람을 고치는 것보다 네가 죽는 것이 쉬운 것을 알기 바란다."

그래서 기도제목을 바꾸었습니다. "주여, 저를 변화시켜 주옵소서."
그때부터 목회가 편해지고 마음에 안정이 생기면서
그 성도를 위한 사랑과 긍휼의 심정까지 생기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목회자가 교인을 스스로 변화시키려고 하면 할수록 괴로운 일만 생깁니다.
그러나 스스로를 죽이려고 하면 문제가 자신에게 있음을 깨닫게 되고
그렇게 되면 새롭게 힘찬 전진의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이 경험은 저의 경험이기도 하고, 이 글을 읽은 여러분들의 경험이기도 할 것입니다.

장로를 바꾸려고 아무리 금식기도 해도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기도에 잘 응답하시지도 않습니다.
자기 자신이 죽는 길밖에 없다는 것이 십자가의 진리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죽이려는 기도가 천하를 얻는 기도입니다.

목사는 교인을 치려 하지 말고 자신이 죽어야 합니다.
목사 한 사람이 죽으면 교인 전체가 목사와 함께 죽습니다.
이것이 바로 목회입니다. 목사가 죽으면 교인들은 따라 편안히 죽습니다.
그러면 평안한 교회가 되고 아름답고 조화를 아는 성도가 됩니다.

이런 원리는 어디에서나 적용이 됩니다.
자신이 죽지 않기 때문에 교회가, 가정이, 나라가 시끄러운 것입니다.
알고 보면 저 사람 책임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책임인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성경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을 느껴보십시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혔나니(나는 죽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오직 예수 뿐이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자기를 죽이는 십자가의 신앙으로 산다)."

이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살면 우리의 삶은 분명 달라질 것입니다.
그러면 환경이 달라져 보일 것입니다. 그리고 진짜 달라질 것입니다.
또한 사도 바울이 고백한 대로 우리는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이고,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임을 실감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평안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문제의 책임을 남에게 돌리는 삶은 이제 같이 포기합시다.

둘째, 일과 휴식의 배분에 지혜로운 사람이 되십시오.

먼저, 일에 열심을 내야 합니다. 잠을 줄일 수도 있어야 합니다.
수면 부족 때문에 죽은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아십시오.
어떤 사람은 잠이 부족하면 될 일도 안될 것이라고 지레 걱정하는 분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저에게 묻습니다. "몇 시간 잡니까?"
"다섯 시간 정도 자는 것 같습니다."
"그것 가지고 됩니까? 적어도 하루에 8시간은 자야 한다고 하는데
5시간만 자고 어떻게 일하십니까?"

지레 걱정을 합니다. 실컷 8시간씩 자고 제대로 되는 사람을 보았습니까?
하루 8,9시간 잔다고 건강해집니까?
여러분! 모두 경험하셨지요. 잠을 더 많이 잘수록 허리와 몸 전체가 아프고
자기 안일이 싹트고, 더 나아가 스트레스가 더 많아지지 않았습니까?

파스칼이 팡세에서 말했습니다.
"생각도 없이, 할 일도 없이, 전념할 일도 없이,
완전한 휴식 속에 사는 것처럼 참을 수 없는 고통은 없다."
여러분! 일이 많다고 괴로워하지 마십시오. 알고 보면 그것은 행복한 것입니다.

일없이 완전한 휴식 속에 있을 때
자기 허무, 자기 불안, 자기 회의, 자기 무력, 자기 공허에 빠지게 됩니다.
바로 이런 때에 마음 깊은 곳에서 권태와 우울과 고뇌와
그리고 더 나아가 인생에 대한 회한과 절망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쁜 것은 원망할 일이 아니고 감사할 일입니다.

그러나 생각 없이 바쁘지는 말아야 합니다.
사람 됨됨이는 그 사람의 일하는 모습을 통해서도 파악할 수 있지만
그 사람의 휴식하는 것에서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 휴식이 주어져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휴식은 바로 우리에게 우리 일을 해석하도록 주어진 시간입니다.
다시 말해서 휴식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인간화하고 비노예화한다는 것입니다.
즉 휴식은 일의 목적을 상기해 보게 하는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휴식 시간을 지혜롭게 활용하는 것은 정신건강을 위해 대단히 중요합니다.

셋째, 굳건한 믿음의 반석 위에 서십시오.

공부, 명예, 지위... 그리고 이런 것들 위에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공부를 많이 시킨다고 인격이 크게 달라지지 않습니다.
지위가 높다고 인격이 크게 달라지지 않습니다.
잘살게 되었다고 인간이 크게 바뀌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럴수록 문제가 커집니다.
모든 것을 성취하여도 인격파탄이 위에서부터 오면 달리 구제책이 없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얼마나 실패의 순간을 많이 겪습니까?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공부, 명예, 지위가 실패의 가능성을 줄일 수 있는 경우도 있지만
그 많은 것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패의 순간을 만나면
그것이 더욱 큰 좌절의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실패의 순간에 가장 필요한 것을 바로 굳건한 믿음입니다.

오늘날 가장 큰 문제는 불안입니다.
정작 사람을 실패하게 만드는 제일 요인은 바로 불안입니다.
그런데 가장 치명적인 불안은 어디서 옵니까?
불신에서 옵니다. 믿음이 있으면 절대 불안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잘 믿어도 실패할 수 있고 불편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참으로 잘 믿으면 불안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안 믿어도 성공할 수 있고 편안하게 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없이 참 평안은 없습니다.
예수님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복은 평안의 복입니다.
정말 예수님을 믿으면 잠깐 불편할 수는 있어도 잠시도 불안하지 않습니다.

현대는 불확실성의 시대입니다. 그래서 현대인의 병은 불안입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한 치 앞은 내다볼 수 없기에 늘 불안하고 초조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자녀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고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십니다.

시편 3편에서 천만인이 나를 둘러치려 해도 두려워 않겠다는 다윗의 고백을 보십시오.
그리고 우리는 자주 찬송하지 않습니까?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470장)
그러한 평안의 근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소망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소망의 근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라는 굳건한 믿음에 있습니다.

여러분! 때로 어려운 상황을 만나 절망적일 수 있으나
우리의 미래는 희망적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런 믿음이 있으면 환난이 있어도 그 환난이 무엇으로 변하게 됩니까?
인내로 변하고, 인내는 연단으로 변하고, 연단은 소망으로 변합니다.
그레이스드 목사님